요즘처럼 손글씨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기가 있을까? 어릴 적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과 손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고, 먼 나라 친구들과 펜팔이라는 편지 주고받는 상황들이 주로 펼쳐지고는 했다. 아빠가 용돈봉투에 용돈을 챙겨주실 때는 '사랑해 정아야'라는 손글씨 멘트와 함께 늘 우리들에게 용돈과 사랑을 전해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아빠도 늘 무언가를 수첩에 어느 노트에 적고 있었던 것 같다. 공무원으로 평생 재직하던 아버지는 매년 받아오시는 묵직한 사무용 수첩을 가끔 우리에게 건네었는데, 나는 초등학교 시절 그 노트에 나만의 이야기를 펼치곤 했다. 일기형식으로 써 내려갔지만, 그날의 소소한 일상과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우스꽝스럽고 나만의 그림과 함께 노트의 빈여백들을 채워나갔다. 나의 일기장은 보통의 평범한 일기장은 아니었다.
일기라는 것은 자신의 속마음과 그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써 내려가는 형식이기에 '나만'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내 일기장은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 소재로 글을 풀어내려가면 일기검사를 한다는 명목하에 아버지는 물론이고, 내 동생들까지 재미있다며! 내 일기장을 보고는 했다. 그렇게 나는 일기와 글을 재미를 알아가기 시작한 것 같다.
한 권 두권 쌓여가는 묵직한 노트들은 어느 순간 (아마도 친정부모님의 이사 등) 없어진듯하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방에는 노트와 수첩들이 간혹 보인다. 일하면서 기록해 왔던 순간들이 있을 것이고 우리를 키우면서 경제적인 것들이나 돈에 관한 것들, 혹은 우리에게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그곳에 자리하지 않을까? 그런 아버지의 등을 보면서 자란 우리는 어느샌가 글을 적기시작하고, 글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입시, 수능, 공부를 위해서면 필기를 해왔다면 30, 40대가 훌쩍 지난 지금은 오롯이 '나를 위해' 글의 흔적을 어딘가에 남긴다. 나의 남동생은 여전히 나의 아이들(조카들)을 대할 때면 많든 적든 용돈과 함께 가지런히 적힌 손 편지를 전해준다. 내 여동생은 그림 그리기에 취미가 있어 다한증 수술을 한이 후 조금 더 자유롭게 자기만의 육아일상을 그림으로 녹여내고 있는 듯하다.
글을 대하고 손글씨를 대할 때 마음이, 진심이 들어간다. 내가 손글씨를 적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쓰고 있는 행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고 있더라도 내 눈을 나의 손글씨를 바라본다. 서걱서걱 연필로 적기도 하고, 매끄러운 볼펜의 촉으로 글을 적기도 한다. 호주에 사는 나의 베스트프랜 수진이는 외국에서 살면서도 한 번씩 나에게 손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내가 힘든 시절, 잠시 한국에 방문한 그녀는 하룻밤 나의 집에서 머물면서 큰 힘이 되어주었다.
5년에 한 번 만날지언정, 만나는 순간 나의 힘듦을 알아주고 함께 짐을 지어주는 그녀에게 참 고마웠다. 나의 위치에 서주고 불편하지만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순간만 큰은 진심이었다. 손 편지를 통해 전해진 그녀의 마음이 여전히 나의 서랍장 한 곳에 자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한국에서 그리고 호주에서 분주히 매일의 일상을 버티어내고 있는 우리지만, 또 그 생활공간 속에서 소중한 추억들을 켜켜이 새겨나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잘 지냈어?"
만나면 으레 전하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이 말은 그간의 세월을 묵묵히 감싸 안아준다. 잘 지냈어?라는 말 한마디로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속속들이 개인사정까지 알지는 못하지만 손 편지로 전해졌던 우리의 시간이라는 줄기가 지금까지 아주 튼튼이 자라나고 있었다. 글을 통해 나의 진심을 전하고, 진짜배기로 하고 싶었던 말을 추려내게 된다. 말은 필터링 없이 툭툭 내볕고 후회할 수 있지만, 글이란 건 한번 정제되고 다듬어져야 나오는 진액과 같다. 말은 두서없이 많지만, 글이라는 걸 적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글의 알맹이가 빠져있다.
우리는 자고로 매일 생각과 고민, 잡스런 생각 따위를 하고 살아간다. 그 속에 대부분은 필요 없는 잡생각일 뿐이고, 일부는 '나만의 의견과 철학이 담긴' 진가 있는 생각일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우리는 매일 어딘가에 적어내고 있다. 생각의 표현은 필사를 만나고 나서 조금 더 강해지고 깊어졌다.
언제부턴가 숨 쉬듯 편안하게 필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영어필사를 하게 된 건 3년 전쯤이다. 더블엠에서 출간한 필사교재가 그 시작이었다. 처음은 아주 간단했다. 내가 작년에 오픈한 (경기도 김포 구래역에 위치한) 최고그림책방은 네이버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문을 열기 전부터 한 달에 한번 열리는 그림책모임과 그림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네이버카페를 만들어 이용하고 있었다. 나의 일상이야기를 올리기도 하고, 책 속의 구절, 그림책 추천등 다양한 이야기를 올리고 있었다. 모임을 열기 전 사람들을 모집하기도 하고, 무료강의나 강좌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그중에 지금까지 잘 유지되어오고 있는 것이 바로 영어필사다. 3년 전쯤 시작한 영어필사는 1,2명에 불과했다. 혼자서 하는 경우도 많았고, 함께 시작은 했으나 이런저런 개개인의 사정으로 인해 몇몇 분들은 잠시 중지되기도 했었다.
보통의 영어필사라고 하면 100일을 기준으로 세운다. 실제로 서점에만 가보아도 100일 영어필사가 대부분이다. 100일 정도 꾸준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내가 정한 영어필사의 목표는 '완주하기'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루도 빠짐없이 100일을 채우는 게 아니라, 누가 언제 시작했든 상관없이 '나라는 사람'을 기준으로 1일부터 (중간에 퐁당퐁당 쉬어도) 마침내 100일째 영어필사를 완주하는 것이 목표다. 나 역시 가정살림을 모두 관할하고 아이들을 케어함은 물론, 일도 하고 시시때때로 학교어린이집 행사도 챙겨야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라 매일의 필사를 놓치는 경우가 생겼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건이 안 되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영어필사를 시작하고 내가 도저히 오늘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뛰어넘기를 몇 달간 지속해 보았다.
5월 10일에 시작한 빨간 머리 앤 필사는 9월 16일에 끝난 셈이다. 100일을 빠지지 않고 했다면 아마 그 이전에 마무리가 되었겠지.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상황과 역할, 지금 마주하고 있는 환경이 다르다. 100일 완주라는 걸 목표로 했을 때 '그럴 수 있지' , '이대로도 괜찮아!' 나에게 전하는 말로도 충분히 머나먼 여정을 항해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단순에 100일을 가려하면 지친다. 누구나 그럴 테다. 엄마들은 더 그러할 테다. 내가 짊어져야 하는 가정의 상황들이 시시때때로 변하고 아이들은 수시로 아프고 병원에 가야 한다. 계절이 바뀌면 감기가 올까 접종을 맞혀야 하고, 시기가 되면 영유아검진을 챙기기도 해야 한다. 내 몸은 어떠랴? 내 몸이 탈이 나는 경우도 생긴다. 시댁행사나 친정식구들과의 만남도 배제할 수 없다. 엄마이기에,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 있는듯하다. 그러니 욕심내지 말자.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부분부터 시작해 보면 좋겠다.
100걸음도 단 1걸음을 시작해야 가능하다. 100일의 영어필사가 부담스럽다면, 30일 영어필사교재를 구입해서 시작해 보자. 2025년 1월을 기다리지 말고, 지금 바로 시작해 보자. 아, 나도 시작해 볼까?라는 마음이 들었다면 영어필사의 세계로 들어온 것을 격하게 환영한다. <최고그림책방> 네이버카페에 가입신청을 하면 정도 많고 따듯함이 넘치는 필사회원들이 격하게 반겨줄 것이다. 당신도 그래요? 나도 그래요. 필사에 묻어나는 서로의 글귀를 보면서, 손글씨를 보면서, 필기체를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또 하루를 마무리한다. 우리는 오늘도 필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