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반 평범한 간호사였다. 대학병원에서 신규간호사로 일을 배웠고 처음 입사한 병원이 내인생의 최초의 직장이자, 어쩌면 최고의 직장이었다. 서울 강동구에 당시 새로오픈한 강동경희대병원은 (당시 동서신의학병원; 이름이 오묘하다!) 우리가 역시 처음이었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걸 함께 만들어간다는 의미가 컸다. 이미 다른병원에서 많은 경력을 가진 간호사들도 채용이 되었고, 나처럼 쌩 신규간호사로 입사한 간호사들(동기)도 있었다. 학교병원이라 그런지 조금은 더 편안한 분위기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지원한 한방병동은 함께 입사한 다른 친구가 발령을 받았고 나는 산부인과/소아과에서 첫 근무와 병동세팅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40대 정도의 파트장(수간호사)도 지금의 내 나잇대니, 어쩌면 새로 발령받은 곳에서 많은 긴장을 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분하고 조근조근 말하는 파트장님과 의외의 카리스마를 가진 파트장님들과 산부인과, 소아과 병동세트를 하나씩 차근히 이루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물론 그지역에도 대규모 아파트들이 생겼고 번화가로 발전했지만, 당시 내가 입사한 시절에만 해도 아주조용하고 한적한 동네였다. 근처 빌라에서 친구와 이후에는 동생과 함께 지내면서 교대근무를 하고 출퇴근했다. 어느 날은 밤 11시정도(이브닝 근무가 끝나는 시간) 퇴근길에 어둑한 밤거리에서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어 주저앉아 울어버린 적도 있고 (지금이라면 당연히 경찰서에 신고를 했을거다) 또 어느날은 자물쇠가 옛날거라 헐거웠는지 좀도둑이 내가 살고있던 빌라에 들어온 적도 있었다! 동생과 함께 살던 방 2개가 모두 헤집어져있었고 좀도둑은 얌체처럼 정말 금만 쏚쏙 뽑아갔다!
병원에서의 다양한 일도 경험했다. 간호사들이 24시간 상주하는 입원병동은 3교대로 이루어지는데, 내 업무가 끝나고 다음 간호사에게 인계를 주어야 한다. 다음 인계자가 무서운 선생님이라도 걸리면, 그날은 전화가 올까봐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산부인과 병동에서는 체액 배출량도 중요해서 잘못 체크하거나, 미처 기록하지못하는 날에는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제대로 기록이나 액팅을 수행하지 못하면 다음번 선생님이 그책임을 감당하거나, 의사에게 보고가 잘못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병원에서의 다양한 경험과 임상경력을 이후 내가 어느곳을 가든 큰 받침대가 되어주었다. 5년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생각보다 많이 성장해있었던 것이다. 20대 초반의 신규간호사가 지금은 40대 책방지기 겸 성교육강사가 되었다. 당시에는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책방을 오픈하고 성교육강의를 시작할 수 있었던 건 끊임없이 책이라는 연결고리를 쥐고 있었고, 간호사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경험해봐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시간이 제법 자유로운 방문간호사도 했고, 작은 병원에서 부터 임상시험회사에 이르기까지 (법률사무소에도 아주 잠깐 있었다!) 의료인이 경험할수 있는 다양한 직종을 만나보고 실제 경험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
집 근처 병원을 다니면서 그림책모임을 한달에 한번 사람들을 모아 진행했고, 주말에 하루정도는 글쓰는법을 배우러 아주 먼곳까지 다니기도 했다. 첫째아이와 함께 일산의 대형서점에 다니기도 하고 일을 쉬는 날에도 혹은 퇴근한 이후에도 성교육가정방문을 다니기도 했다. 나의 이런 노력과 시간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건, 2년 전 성교육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을때 부터다. 그림책에 관한 이야기를 적다보니, 그림책으로도 성교육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주변 이웃들과 나누기 시작했다. 블로그나 네이버카페에도 그림책 추천을 하고, 그때 작게나마 시작한 인스타에도 성교육그림책에 관한 짧은 사진과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하나의 계기를 또 다른 기회를 불러온다. 경기도 광명에서 성교육을 듣기위해 먼 김포까지 방문해준 것이다. 이 또한 인스타를 통한, 그리고 평소 내가 자주 방문했던 책방을 통해서 얻을 수 있던 기회였다.
그렇게 나는 본격적으로 성교육강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강사라는 타이틀은 단 한순간에 얻어지는 건 아니었다. 처음 대형서점에서 저자북토크를 할 때에도 전날 잠을 설칠정도로 긴장되었고, 연습도 했다. 방문간호사 시절에도 꾸준히 책을 접하기도 했는데, 방문고객을 만나긴 전 잠시 차에서 대기하는 시간이나 짬이 나는 시간을 이용해 책을 읽어내려갔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강사'라는 직업에 대한 책이 있었는데, 어르신들을 대하는 작가님 또한 처음에는 시급 1~2만원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내가 강사를 할거라는 생각은 못했지만, 실제 강사를 경험해보니 시급 2~3만원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강의 한번을 위해서 몇일을 준비한다. 여기에는 강의자료준비 뿐만 아니라 마음가짐의 준비도 포함된다. 연기자들이 단 하나의 씬을 찍기위해 대사를 외우고 연기연습을 하는 것처럼, 무대에 서는 강사 역시 독자들을 대하는 강연이라는 장소에 서기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하는 것이다.
내가 강의를 시작하고 강사가 되기까지 포인트를 정리해보았다. 만약 이 글을 보는 독자님 중에 강사를 꿈꾸는 분이 계시다면, 꼭 기억해두고 자신만의 강의분야를 개척해나가기를 바란다.
1. 내가 평생 몸담아온 전문분야를 활용하라
내가 20년 가까이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정말 다양한 분야를 경험해보았다. 병원과 병원밖에서도 간호사로서 의료적인 지식을 펼칠 기회가 많다는것도 알게 되었다. 소아과, 산부인과에서 처음 시작한 간호사경력은 내가 이후 다른 직종을 가는데에도 큰 기반이 되었다. 어린 아기들의 주사를 놓는 전문기술은 물론 보호자를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의료진 사이에서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고 보고전달해야하는 지, 방문간호를 하면서 처음 사람을 대할 때 필요한 응대방법은 이후 강사와 책방을 운영하는 동안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간호사로 오랜기간 일하면서 간호사국가고시 출제위원으로 참여하는 기회도 가지게 되었고, 산부인과 소아과의 임상경력은 이후 성교육강사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사례를 접목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시너지효과로 작용하게 되었다.
2. 퇴직하기 전부터 작게나마 시작해보라
창업도 강사도 요이땅~! 시작하기 전부터 내가 근무하는 곳에서 미리 경험해보고 체험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책방을 열기전부터 나는 그림책모임을 진행하고 있었고, 간호사로 일하는 기간동안에 (퇴직하기 전부터) 성교육강의를 알음알음 시작하게 되었다. 본업인 직장생활을 하면서 쉬는 날이나 퇴근한 이후 강의요청을 하는 곳이 있다면 서슴치않고 달려갔다. 육아도움을 받을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많이 힘들었지만, 아이돌보미를 신청해가며 강사로서의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3. 강사를 본업으로 생각하다 큰코 다친다
간호사를 그만두고 책방으로 전향하면서 따박따박 매달 나오는 월급이 없어졌다. 책방운영과 강의활동을 병행하면 되겠다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실제 운영한 기간이 얼마되지않으니 대출자체가 원활히 진행되지 못했다. 강사가 본업이 되기 위해서는 월등히 많은 강연료를 받아야하는데, 실제로 강의를 다녀오면 사실 남는게 없다. 강의를 준비하는데 오고가는 경비, 메이크업비용, 옷매무새를 신경써야하기 때문이다. 본업을 유지하면서 가능한 일정에 강의를 하는 이유다.
4. 나를 알리고 얼굴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처음 책을 내고 프로필사진이란 걸 찍어보았다. 나의 블로그, 내 책에도 당시 찍었던 프로필사진을 아주 잘 이용하고 있어서 찍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전국의 강의를 섭외하는 분들이나 사서선생님들이 언제어디서 연락이 올 지 모른다. 내가 운영하는 유튜브, 블로그, 인스타를 통해서 다양한 채널을 통해 강의요청과 섭외가 들어온다. 책에 나타난 내 이미지를 통해, 블로그에 올려진 내 자신을 통해 믿을수있겠다는 마음이 들고 어떤식으로 글이 올려져있는 지 확인 후 연락을 한다. <그림책읽기티비> 유튜브채널에 책만 올리는 게 아니라, 내 얼굴을 함께 촬영하는 이유다. 책 소개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촬영하고 표정이나 말투로 그림책이야기를 전하면서 구독자들은 재미와 감동, 책에 관한 흥미를 함께 느끼는 것이다.
5.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건 없다. 강사도 마찬가지다.
많은사람들 앞에 서는 강사라는 자리는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지만, 누군가에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무대 위에 서는 순간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지만, 평소에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걸 좋아하지않는 사람의 경우 이 자리가 부담스럽고 긴장감이 몇백배나 증가할수 있기 때문이다. 말도 글도 연습하고 하면할수록 늘어나는 것 같다. 처음에 한줄두줄 쓰기 어려웠던 사람도 글쓰기수업을 반복하면 할수록 자연스럽게 10줄 이상의 자기만의 이야기를 적어내려가는 걸 발견하게 된다. 대중 앞에서 말하는 강사라는 직업도 모두 처음은 초보였고, 신규시절이 있었다. 다양한 의견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 앞에 설 때 나만의 생각과 철학을 전달하는 일, 반대의견이 있더라도 어떤식으로 대처하고 강의를 끌어가야할지 이 모든건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인정하고 나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마침내 공감을 이루어낼 때 강의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한 것이리라. 조바심내지 않고, 오늘의 퀘스트하나를 완료했다는 기분으로 나는 매일 그날의 강의성적을 체크한다. 매번 매순간 강의실에 들어설 때 새롭고 설렌다.
여섯 번째는 나만의 과정, 커리큘럼을 수십가지 수백가지 만들어보고 시작해보라는 것이다. 분명 그 중에서 나와 맞는, 상대와 잘 맞는 찰떡궁합인 과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올 한해 미리캔버스를 이용해 만든 카드뉴스와 인쇄제작물만 200~300여개에 달한다. 그중 쓸모있는것도 있고 업데이트후 사라진것들도 많다. 내가 고민하고 구상한시간들이 자료와 결과물로 만들어져 나만의 브랜드를 형성해나간다. 강의일정이 잡히면 수업자료를 업데이트하고 매달 책방에서 필요하고 소화가능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든다. 수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한번 해볼까? 라는 마음으로 접근하고 준비해본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날 좋아할수는 없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나 역시 나의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 몇날몇일 고민하고 실행한 것들이 반대에 부딪히거나 오해를 산 적이 수도없이 많았다. 책방일을 하고 글쓰기를 하고나서 이런 일은 더욱 많아졌다. 모두 나의 선택과 결정이 들어가고 잘되든 잘못되든 나의 책임의 몫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날 좋아할 수는 없으니, 안좋은 상황이나 예기치못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곁에 남아주는 사람들과 오랜기간 함께 갈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강사라는 타이틀이 달린 순간, 나는 성교육강사로 변신한다. 남들이 가지않았던 그림책성교육강사 라는 길을 처음으로 개척해나갔다. 간호사로 성실함을 기본으로 진심으로 환자와 보호자를 대하고 간호하던 순간들이 지금의나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책과 가까워지고 글을 쓰기시작하면서 전문간호지식을 결합해 성교육이라는 메시지를 전할수 있었다. 남들이 가지않은 길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지를 알고있다. 뿐만 아니라 그길이 사회에 필요하고 매력적인 분야인지 알고있다. 나에게서 시작되는 메시지는 지금도 잔잔히 그리고 강렬하게 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