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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정 Jul 21. 2020

그게 나야.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나는 차에서 일한다. 아침 7시 30분. 아침 돌보미선생님이 오신다. 나의 두 아이를 돌보아주시고 학교, 어린이집 등원준비를 시켜주신다.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 나는 나의 집으로 출근하신 돌보미선생님과 눈인사를 맞추며 조용히 집을 나선다. 보통의 직장생활에서는 오전 9시가 출근시간이다. 나는 장거리운전을 해야하고 방문 간호업무를 수행하는 간호사다. 보통 어르신 집으로 바로 출근을 하기 때문에 마포에 있는 직장으로 향하지 않고 집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다. 1시간 남짓 방문하기 까지 남는 시간이다. 카페에서 얼음이 동동 띄워진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한다. 해가 바로드는 창가 말고, 나의 아지트가 있다. 카운터를 마주보는 방향으로 길게 늘어진 테이블에 오늘도 앉는다. 익숙한 듯 전원코드에 노트북 연결선을 연결한다. 전원을 켜고 브런치를 연다. 그리고 그날 방문일정을 확인한다.


먹구름 낀 하늘을 볼 수 있는 특권

잔뜩 먹구름이 낀 날이 있었다. 요즘처럼 장마기간이면 우르릉 쾅쾅 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게 웃는 햇님을 맞이하기도 한다. 비가 주룩주룩 오면서 세차를 하는 것 처럼 세차게 퍼부을 때가 있었다. 경기도 일산, 파주 지역을 늘 접하는 데 그날도 그랬다. 빗 속에서 일하고 빗 속에서 운전했다. 빗 속에서 음악도 듣고 빗 속에서 생각도 가다듬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파주의 드라이브길을 달리는 흩날리는 길가 풀숲들이 보였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뭉게뭉게낀 구름도 살포시 보였다. 어두운 듯 하지만 이루말할 수 없는 벅참이 가슴 한 가득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럴 때가 있다. 보통의 어느날이지만, 어느 날, 어느 장면, 어느 기억은 오롯이 내가 온 마음으로 집중하는 순간이 있는 듯 하다. 그 장면도 그랬다. 십 여년전 나 혼자 유럽 배낭여행을 다닐 때도 그랬다. 저녁나절에 유스호스텔에 머물면서 주인내외와 함께 투숙하는 언니와 우리는 근처 호숫가로 향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시간, 산 속에 달빛과 별빛과 잔잔히 흔들리는 강가의 호숫가의 느리지만 아름다운 장면이 내 평생동안 간직하게 되는 이미지로 각인이 되어버렸다. 그런 기억들이 하나 둘 가슴 속에 새겨지는 듯하다.


좋아하는 93.9 라디오를 마음껏 들을 수 있는 특권

지난달, 파주의 도로를 시원하게 달린 적이 있다. 차로 말이다. 길게 쭉 뻗은 파주의 자유로는 해방을 의미하는 듯 하다. 파주는 드라이브다. 드라이브를 하는 기분으로 방문을 끝내고 올 때가 있다. 파주에서 일을 끝내고 오는 길에 내 귀에 익숙한 음악소리가 들린다. 늘 그렇듯 93.9에 주파수를 맞추어 놓는데, 그 날도 여지없이 눈물을 달짝지큰하게 쏟아낼 듯한 음악을 선물해주었다. 시간대별로 음악의 분위기도 다르다. 차분한 클래식으로 시작했다가 점심 나절에는 경쾌하고 시원한 잠을 쫓는 노래들이 무방비로 쫓아오기도 한다. 오후를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익숙한 올드팝이나 정겨운 음악들이 주를 이룬다. 저녁 6시는 배미향의 라디오방송이 나오는데, 나는 특히나 이 시간대를 참 좋아한다. 사실 퇴근길이라 길이 막히는 날에는 바쁜 걸음을 재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근길 나지막히 들리는 감좋은 음악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내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진다. 문득 엄마가 생각나고 그리운 날에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종잡을 수 없는 음악들, 그리고 또 종잡을 수 없는 내 마음이다.


파주는 드라이브다. 

운전은 때로는 피곤하다. 가끔 아주 많이 피곤하다. 김포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파주로 시흥으로 또 서울로 오며 다니는 길은 멀다. 몸이 축 날 때도 있고 다리가 뻑적지근하게 아파올 때가 있다. 십 여년 전 수술한 목 부위가 무리가 와서 어깨가 뭉치도록 아픈 날들도 있다. 그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다. 조금 아픈 날도 있고 정말 못 일어날 정도로 아파서 누워있었던 적도 있다. 그래도 나는 차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차에서 간식도 먹고 차에서 글 쓸거리를 생각해내기도 한다. 보통 어느날은 차에서 멍을 자주 때린다. 나라는 사람이 그렇다. 차가 잠시 정차한 틈을 타서 바깥 경치를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새 떼를 보기도 하고 하늘 위로 부웅~ 이륙하는 비행기를 바라보기도 한다. 비가 온 뒤 후두둑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내뿜을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건 내가 하는 일을 가짐으로써 가질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하늘도 경치는 선물이다. 자연의 가치있는 것들을 가까이 대할 때 나는 행복을 느낀다. 가을 바람에 나뒹구는 나뭇잎을 보는 날도 있었고, 차가운 비바람이 나부끼는 거리를 헤맬때도 있었다. 벚꽃이 한참 나풀거리고 흩날리는 계절에는 우수수 봄의 눈꽃이 쏟아지는 광경을 여러차례 바라보기도 했었다. 올 여름에만 유독 밝게 빛나는 빠알 간색의 장미꽃을 유난히 많이도 봤었다. 


지친 어느 날 걷고 또 걸었다

운전하기 싫은 날은 차를 세워두고 역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호수공원을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운전을 하다보면 운전을 하기 싫은 때가 오는 듯하다. 매일 장거리를 달리다보면 몸이 경직되기 마련이고, 특히 서울 한 복판에서 이리 헤매고 저리로 길을 잘못 들어 진땀 꽤나 흘리는 날에는 더욱 그렇다. 인천의 주택가에서 주차를 할 곳이 없어서 헤매기도 하고 비가 몹시 쏟아붓는 날에는 어르신 집을 찾아다니는 일도 버거운 요즘이었다. 그러다 문득, 걷고 싶었다. 나는 걷는 걸 좋아했지! 그래. 나는 걷는 걸 좋아했다. 

이런 나의 성향과는 반대로 배우자는 걷는 걸 싫어했다. 배가 뚱뚱 나올지언정 걷는 것도, 바깥 산책을 나가는 것도 귀찮아했다. 나는 걷는 걸 좋아했고 바깥 나들이 산책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를 키울 때도 늘 아이 손을 잡고 공원을 가고 도서관을 가고 맛있는 떡볶이도 먹으러 다녔다. 그렇게 소소한 재미와 추억이 아이와 나 사이에는 존재한다. 그런 기억을 더듬어 그날은 걸었다. '너무 먼가? 그냥 지하철을 타야했나.' 하는 생각도 잠시 걸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옴짝달싹 꼼짝마라 움켜쥐고 있던 내 몸을 풀어주던 순간이었다.


운전하면서 오른발로 밟고 핸들로 돌리고 쉴새없이 안전을 생각하며 운전을 해야했다. 운전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나의 일이 그랬다. 방문을 다니면 운전을 해야 하고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 늘 먼거리였다. 서울로, 인천으로, 경기도 외곽으로 차를 몰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막히는 퇴근 시간, 뚫리는 평일 낮시간, 쉬운 길, 찾기 어려운 길, 차가 많은 길, 적은 길, 쭉 뻗은 길, 꼬불꼬불한 길 이런 길, 저런 길을 둘러둘러 다녔다. 

나의 발에게도, 손에게도, 눈에게도 나의 온 몸에게 쉼을 주고 싶었다. 그래. 너 좀 쉬어라.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어버릇해야지. 한 번 쉬어본 사람이 또 쉴 수 있을테니 좀 쉬었다 가자. 누가 뭐라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달려드는 것도 아닌데, 왜그렇게 나를 몰아부쳤을까? 직장상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나를 다그치면 누가 나를 알아주기라도 할까봐? 주위의 신경을 안 쓴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사람이기에 어울려 다니고 싶은 동료이고 싶었기에, 그리고 나 이렇게 일하고 있어요! 참 열심히 하죠? 좀 알아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쉼이 숨이 되었다. 나를 까마득히 싸고 있던 뭉게구름 같던 어두운 안개가 서서히 벗어져나갔다. 까만색으로 얼굴 덜룩 얼룩져 있었던 나의 마음이 조금씩 새 살을 톡톡 터뜨리고 있었다. 다시 내가 되어가고 있었다. 겉으로만 웃는척, 아무렇지 않은 척 했던 내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보기로 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 그게 바로 나다. 

가면은 때로는 피곤하다. 나도 사람이기에 환자에게 버럭 일침을 맞은 날에는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게 되고 자그마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겉으론 상냥하게 웃는 척 아무일 없었던 일처럼 해보려 하지만 그렇게 안 된다. 감정을 소유한 사람이기에, 오늘을 살고 또 내일을 바라보는 나라는 사람이기에. 더욱이 나라는 존재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인격의 소유자인 걸 알아버렸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꼭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않는다.

어쩌면 아무도 만족시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면을 벗어버리고 솔직해지자. 간호사라고 해서 하하호호 매번 웃을 필요는 없다. 엄마라고 해서, 아내라고 해서 "네~그러세요. 그렇게 하세요." 상냥해보이는 코스프레는 이제 벗어버릴란다. 열이 뻗치게 힘든 날에는 맛있는 음식으로 달짝도톰한 함박스테이크를 나에게 대접한다. 나에게 맛있는 걸 먹인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배우자에게 "가지마. 함께 육아를 해야해"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 결국 나의 화를 돋구는 것을 알고, 그에 대한 화살이 또 남편에게 가족에게 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내 몸이 편하고 나의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야 좋은 기운과 아우라가 펼쳐진다는 것을 안다.


벚꽃이 흩날리는 것을 좋아하고 문득 틀어진 라디오소리에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흥얼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초록빛깔을 머금고 있는 파릇파릇한 잎사귀 보는 것을 좋아하고 내 발로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을 좋아한다. 옷을 고르거나 쇼핑을 하는 것보다, 책을 고르는 일이 더 재밌고 신나는 나라는 사람이다. 운전을 좋아했지만, 일적으로 장거리를 뛰는 하면서 잊고 있던 걷기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고, 꼭 배우자를 옆에 붙들어두고 보다 나 혼자라도 혹은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를 가고 산책을 즐기는 일상의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다. 긴 머리와 단발보다는 이제는 쇼커트의 갈색머리가 제법 잘 어울리는 나라는 사람은 바지 하나를 두고 일주일 매일 같이 입을 수 있다. 조각난 퍼즐을 하나씩 맞추듯이 나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 희미한 색깔을 맞추기도 하고 강하고 붉은 색깔이 어느 날은 퍼즐이 딱 맞기도 한다. 한 가지로만 딱 정의내릴 수 없는 나를 나답게 하는 것. 오늘은 또 어떤 나를 만나러 가게 될까? 매일 나서는 새로운 걸음이 나를 또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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