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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정 Aug 09. 2020

내 허벅다리는 다 젖었고 커피는 다 쏟아졌다

커피가 뭐라고

오늘도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연이은 비 소식에 축축한 빨래더미가 눈에 들어온다. 세탁기를 돌리고 선풍기 바람을 쐬어도 꿉꿉한 냄새가 올라온다. 안방에 유일하게 있는 에어컨 바람을 쐬어주기 위해 빨래 건조대를 옮기고 제습을 돌려보아도 여전히 굽굽한 냄새가 올라온다. 어제 저녁 어질러진 거실과 주방을 대충 정리했다. 엄마의 본분은 잊지 않았기에, 주방에 있는 잡다한 쓰레기들과 먹다 남은 포장 꾸러미들, 그리고 음식 쓰레기를 연이어 정리했다. 그리고 나는 빨래를 돌렸다. 빨아도 좋은 향이 나지 않는 타월을 모조리 거둬들였다. 손에 한 아름 감싸쥐고 세탁기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이가 쏟은 분유에 어질러진 이불도 함께 넣었다. 꽤나 묵직한 부피가 되었다. 오늘은 빨래방에 가기로 한 날이다.(나 혼자서 작정을 했다. 계획을 이미 세워두었다. 주말엔 꼭 빨래방에 가서 상쾌하고 따끈한 빨래더미를 만져보기로 말이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삑삑삑. 세탁이 다 되었다는 울림이 들렸다. 나는 묵직한 빨래더미를 세탁기 통에서 차례로 꺼내어온다. 빨래통 더미에 어느새 세탁이 다 된 빨래가 한가득이다. 꾹꾹 눌러담으며 빨래더미통을 카트에 싣는다. 그 사이 둘째 아이가 일어나 분유를 먹이고 남편에게 다녀온다고 전한다. 이미 이전에도 셀프 빨래방 투어를 몇 번 했던 터라 그러려니 한다. 잘 다녀오라는 식이다.(자신이 대신 가겠다고는 절대 말을 안한다).


세워둔 가장 큰 우산을 집어들고 코인을 넣어야 하기에 빨간색 장지갑을 챙긴다. 그리고 카트에 실린 빨래통을 드르륵 끌며 현관문을 나선다. 꽤나 거센 비바람이 나를 마주한다. 쏴아~ 쏴아~ 한여름의 소나기치고는 꽤나 무서운 기세다. 이런 날씨에 꼭 가야할까? 3초 쯤 생각을 하다가 눅눅한 빨래더미가 싫어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럼 그럼 나는 꼭 오늘은 반드시 깨끗하고 뽀송뽀송한 빨래를 하고 말거야~) 이미 세탁이 되어 축축하게 젖은 빨래더미들은 꽤나 묵직하고 무거웠다. 비는 오고 큰 장우산을 펼쳐들고 또 한 손에는 거대한 빨래통을 드르륵 끌고간다. 정말 다행히도 길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전 8시경? 아침 이른 시간이기도 하고 어느 누가 물어보듯 오늘같은 장마가 심한 날에는 바깥으로 나오는 사람이 바보다.(역시 나는 바보)


빨래방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꽤나 기분이 좋다. 이 곳에서 뽀송뽀송 마주치게 될 나의 빨래들을 생각하니 연신 기분이 좋았다. 30분 정도의 건조시간에 4000원. 금액치고는 꽤나 비싼 금액이다. 하지만 나처럼 돈을 지급해서라도 말끔하고 상큼한 옷을 입고 싶은 사람에게는 꽤나 투자를 할 만한 금액이었다. 오래간만에 와서 순서를 기억하지 못했다. 건조기는 총 3대. 위쪽에 위치에 건조기는 텅 비어 있었다. 문이 닫혀 있어서 코인을 넣어야 문뚜껑이 열리는 줄 알았다. 살짝 문을 열어보았지만 열리지 않는 걸 보니 코인을 먼저 넣어야 문이 열리나 보다 했다. 그렇게 나는 아주 보기좋게 4000원을 날렸다!! 설명서를 제대로 한번 더 읽어보지 않고 감행한 결과였다. 처참하게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거금 4000원을 그냥 날렸다. 코인만 넣고 빈 통은 뱅글뱅글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잘만 돌아갔다. 

두 번째 시도. 이번에는 아래쪽에 있는 건조기에 빨래를 먼저 넣기 위해 문을 열어보았다. 아까는 그냥 살짝 잡아당긴 정도여서 문이 안 열렸나보다. 문 손잡이를 힘을 살짝 주며 여니 열렸다. 이런.. 그렇게 첫 번째 대 실패로 인해 두 번째 시도에는 문을 먼저 열고 빨래를 몽땅 집어넣을 수 있었다. 축축한 빨래더미들을 하나 둘 차례로 모두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코인을 넣었다. 500원 짜리 동전으로 바꾸고 총 4000원을 투자했다. 그리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이제서야 제대로 빨래를 넣고 작동이 되었다. 고온, 중온, 저온이 있는데 나는 타월이 월등히 많아 고온으로 선택했다. 뱅글 뱅글 돌아가며 건조기를 한참을 구경했다. 축축하고 입어도 습하던 옷들이여 이제는 안녕~ 뽀송뽀송하고 새 옷같이 보드러운 느낌으로 다시 만나자 얘들아~ 빨래들과 잠시 후를 기약하고 빨래방을 나섰다.


빨래방이 있는 건물은 타 아파트단지에 있는 상가가 즐비해있다. 긴 복도를 주욱 따라들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비가 억수로 퍼붓고 있고 바람까지 굉장한 기세로 불고 있었다. 이럴 때  비를 피해 걸어갈 수 있는 실내 복도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복도에도 비바람이 들이닥치긴 했다. 평소 가보지 못했던 길. 식당가의 뒷 모습이다. 김밥집, 반찬가게, 치킨집들의 뒷 모습 뒷 구멍을 차례대로 구경하며 지나갔다. 여기 이런 게 있었네? 이런 가게도 있었네? 새로웠다. 평소에는 식당과 가게의 번듯한 앞 모습만 보아오던 것과는 다르게 누군가의 숨기고 싶은(?) 뒷 모습을 구경한다는 건 꽤나 새로운 경험이었다. 음습하고 어둡지만 그래도 비를 피해 한 걸음 걸어갔다.


카페에 잠시 들르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오전 8시30분 그리고 주말에 일찍 문을 연 카페는 어디에도 없었다. 카페를 총 3군데를 지나왔건만 나를 반겨주는 불 켜진 카페는 없었다. 빨래를 다 하고 수거해 올 때쯤 한번 더 와봐야지. 그때 커피를 마셔야지 생각했다.

허벅지까지 거세게 몰아치는 비로 축축히 젖었다. 빨래를 뽀송하게 맡기러 갔는데 내 다리, 내 바지는 어느새 비로 흥건히 물들어 있었다. 잠시 집에 들러 쉬기로 했다. 안방에는 남편과 둘째 아이가 나란히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첫째는 어제 늦게잤는지 아직까지 코 자고 있었다. 남은 쓰레기더미 정리를 하고 컴퓨터도 켜본다. 여전히 바깥에 비는 거세고 세찬 빗소리만 귓가에 들린다. 10여분이 지났을까? 지금쯤 건조기가 다 되었을거다. 가는 길에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묶어놓은(날파리가 날아다니는) 쓰레기더미를 챙기고 집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선 것 치고는 꽤나 발걸음이 무거웠다. 문제는 빨래방에서 빨래를 찾은 후에 일어났다. 긴 복도를 다시 지나 빨래방에 도착했을 때 뽀송한 빨래들이 역시나 나를 반겼다. 이불, 아이 이불, 수건 그리고 내 옷들, 아이 옷들 모두 향긋한 빨래의 향이 났다. 얼마만에 이 향기를 맡아보는 건지. 세탁기에서 세탁을 해도 말려도 제대로 건조가 되지 않아 늘 눅눅하고 쾌쾌한 냄새를 풍기던 옷이었다. 건조기 덕분에 좋은 느낌의 옷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건조기에 돌아가서 따근한 감촉이 남아있는 옷들은 빨래의 즐거움을 충분히 깨워주었다!

역시 건조기가 있어야 해. 빨래방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래가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빨래란 귀찮고 성가신 집안일이었는데 건조기에서 옷들을 꺼내고 개어보니 산뜻하고 즐거운 기분이 든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도 1층에 빨래방이 있다면, 코인 건조기가 있다면 참 좋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이불과 옷가지를 개고 세워두었던 빨래통 속에 가지런히 켜켜히 쌓아올렸다. 어느새 빨래통이 가득차고 매고 온 가방에도 남은 옷가지를 챙겨넣었다. 잠시 비가 주춤해진 걸까? 아까보다 빗소리가 줄어든 느낌이다. 바로 옆 메가커피 카페를 지나치다 문이 열린 것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문 될까요?" 한 여성직원이 내 주문을 받아주었다. 빨래를 마치고 커피 한 잔 하는 여유를 가져볼까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 라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수첩에 끄적거리기도 하고 내 생각을 적기도 했다. 아침 시간, 혼자 이것저것 생각해 둔 것을 수첩에 옮겨적어 놓았다. 생각은 뭉게구름 같기도 하고 솜사탕 같기도 하다. 어느 새 연기처럼 휘익~ 사라져버리기도 해서 생각날 때마다 메모해 두는 습관이 생겼다. 빨래하다가 웬 청승이람.


두, 세모금 마셨을까? 비가 더 내리기 전에 집으로 가기로 했다. 빗줄기가 약해진 것 같았는데 다시 거세어진다. 하필.. 지금. 커피를 들 손이 없었다. 장우산을 펼치고 손가락으로 겨우 커피를 받치고 왼손으로는 빨래통 카트를 끌면서 속으로 '이런 젠당. 커피는 또 괜히 시켜가지고..' 후회아닌 후회를 또 한다. 아까 지나온 복도길로 갔으면 되었을 텐데, 비가 갑자기 퍼부어서인지 정신이 나간 통이라서 그런 지 바깥에 흩뿌리는 거센 빗줄기를 맞으며 길을 걸었다. 신호등 앞에서 한 참을 서있는데 커피가 위태위태하다. 커피 잔 속에 동동 띄워진 얼음들이 달랑달랑 흔들린다. 바람에 이리 저리 기웃거리는 우산 덕에 커피잔 속 얼음들도 달캉달캉 부딪힌다. 오 마이 갓! 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초록불로 바뀌고 카트를 질질 끌고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데 아뿔싸! 커피잔이 퉁 튕겨지며 반 이상의 커피가 공중으로 분사되었다. 아.. 이게 뭐라고. 손에 움켜진 커피가 보기 좋게 길바닥에 흩날렸다. 빗줄기와 섞여 커피향만 남긴 채 커피는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 사이 저쪽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차가 보인다. 저 차안의 주인은 나를 보고 있겠지? 커피를 엄청 많이 쏟은 것도 보았을 것이고 우산은 비스듬히 바람에 날려 손으로 커피잔을 애써 움켜쥐고 있는 내 몰골을 보고 있겠지? 아 진짜. 너무 창피하고 민망하다. 

차 주인이 볼 거라는 알면서도 급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보든 말든 카트위 뽀송한 빨래들 마저 젖을 지경에 이르렀다. 커피가 뭐라고.. 바람은 더욱 거세게 휘몰아쳤다. 우산은 더욱 제껴졌다. 이리 저리 갈대마냥 바람이 이끄는 대로 우산도 나뒹굴었다. 어쨌든 우산을 받쳐야 하기에 있는 힘껏 손아귀에 힘을 주고 우산도 잡고 커피잔도(이미 플라스틱컵은 있는 힘을 다 주어서 찌끄러져있었고 남은 양은 아주 조금이었다. 그런데도 그걸 지키려 애쓰는 내 모습이 더 가관이었을 거다) 찌끄러져 그나마 남은 얼음마저 바깥으로 튕겨질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결국 몇 미터를 남겨두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잠시 비를 피할 목적으로 들른 분리수거장에서 남은 커피를 버렸다. 얼음과 함께. 큰 용량의 커피는 그렇게 바닥에 빗줄기와 함께 섞여져 내려갔다.


커피가 뭐라고. 뽀송했던 빨래는 겉은 비 때문에 살짝 젖어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라서 다행이다. 비에 홀딱 젖은 내 모습이 더 가관이다. 커피와 비로 얼룩진 옷가지들을 모두 벗었다. 그 사이 현관으로 마중나온 둘째 아이를 꼬옥 끌어안았다. 졸렸는 지 눈을 비빈다. 잠자리에 눕히고 토닥토닥해주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남은 빨래들을 제자리에 옮기고 가장자리가 난리통에 젖은 이불은 널어둔다. 


여전히 비바람은 몰아치고 내 허벅다리는 비와 커피에 젖었다. 뽀송하게 빨래는 말랐고 내 커피는 갈 곳을 잃었다. 커피가 뭐라고. 그렇게 아등바등 쥐고 온 노력이 가소롭다는 듯이 나를 비웃는 기분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면서 나를 생각한 시간만 생각하자. 그리고 뽀송하게 빨래는 잘 말랐고 따근한 감촉의 옷을 입으니 기분도 따근해졌다. 옷은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보관이 문제다. 새로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관리가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건조기를 꼭 사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이런 여름철, 장마기간에는 기분좋은 뽀송함을 선물해주는 건조기란 녀석이 참 제격이다 싶다. 건조기야 조만간 우리집에서 보자~ 우리 집 빨래들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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