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빈 플랜팅카 - 지식과 믿음 (1)
1. 오늘의 질문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고 생각할 수 있을까?
1.1 질문의 배경
만약 누군가 나에게 ‘너 진짜 하나님을 믿어?’ 하고 묻는다면 난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답을 찾으려고 한다. ’ 기독교 믿음’이라는 것이 진짜로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차가운 현실로부터 위안을 얻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심리적 생성물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전에 이 ‘기독교 믿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우리가 인식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부터 먼저 확인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없다면, 이를 기초로 한 ‘기독교 믿음’은 당연히 엉터리일 테니까 말이다.
* 이 글은 앨빈 플랜팅카의 '지식과 믿음'의 일부를 읽고 기록한 글입니다.
2. 생각할 수 없다 vs 있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측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세계에 존재하므로, 우린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다.
반면 이 책의 저자인 앨빈 플랜팅카는 주장한다.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고 말이다. 각 주장의 근거를 한번 따라가 봤다.
2-1.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표주자로 ‘칸트’가 있다. 갑자기 ‘칸트’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갑자기 도망치고 싶어질 수도 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평범한 일반인 독자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칸트는 이 세계가 2가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사물 자체의 세계 (things in themselves)이다. 용어가 너무 어렵다. 쉽게 말해,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인간과 별도로 존재하는 범접할 수 없는 세계를 말한다.
두 번째로는 우리를 위한 사물의 세계(things for us)가 있다. 이는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세계를 말한다.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집, 큰 산, 바다가 있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를 말한다.
칸트는 ‘하나님’은 첫 번째 세계인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세계-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칸트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하나님을 전혀 붙잡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칸트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기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답한 셈이다.
더불어, 칸트는 ‘선험적 지식’을 인정하지 않았다.
선험적 지식이란,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적 추론으로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한다.
선험적 지식의 예로는 ‘7+5=12’가 있다. 이처럼 경험하지 않아도 우리는 7 더하기 5는 12 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칸트가 ‘선험적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 7+5=12’ 임을 부정하는 것인가? 칸트는 말한다. ‘7+5=12’라는 걸 우리가 아는 이유는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이해하기로 ‘구조’를 세웠다는 것이다. 즉 내가 만든 작품을 내가 알고 있다는 논리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 칸트’는 선험적 지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진리와 같은 형태인 ‘하나님’이란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이란 존재를 인간의 경험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2-1.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
이에 대해 저자 플랜팅카는 이렇게 되묻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선험적 지식을 가지지 못하도록 창조하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주에 대해 알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 이유를 찾지 못한다고 플랜팅카는 말한다.
칸트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 알 수 없다. 따라서‘하나님’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발언인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 자체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의 발언 속에 이미 ‘하나님’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랜팅카는 칸트의 논리가 스스로를 약화시키고 있음을 설명했다.
3. 나의 해석
이 글을 읽으면서 C.S. 루이스의 비유가 생각났다. 루이스는 하나님과 인간의 위치를 설명할 때 셰익스피어와 햄릿의 관계로 묘사했다. 즉 하나님은 극작가이고, 인간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설명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안다. 당연하다. 자기가 만들어낸 창조물이니까 말이다. 반면 주인공 햄릿은 자기를 창조시킨 셰익스피어의 존재를 알 수 없다. 멀리 살아서가 아니다. 다른 시대에 태어나서가 아니다. 이 둘은 아예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다. 아마 이게 칸트가 말했던 하나님은 ‘사물 자체의 세계’에 속한다는 의미인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다루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을 대화의 주제로 삼고 있다.
만약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작가 본인에 대해 알고 있는 인물로 창조했다면 어떨까? 그랬다면 분명 햄릿은 자기를 창조한 셰익스피어에 대해 알았을 것이고 그 내용은 소설 속 가장 중요한 타이밍에 등장했을 것이다. 반면 햄릿에게 극작가의 존재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었다면 어떨까? 햄릿이 셰익스피어에 대해 생각하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롭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이 자신에 대한 힌트를 처음부터 인간 안에 심어놓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 지금 나에게 주는 의미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지금 나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 존재가 있든 없든, 나는 일어나서 똑같이 회사에 출근해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가 녹초가 되어 퇴근하는 삶을 반복하는데 말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버스 창문에 기대 눈을 감았을 때 문득 드는 생각.
'나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회사라는 소속은 있지만 방향성이 없다. 어디엔가 소속되기 위해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르고 달렸다.
결국 남은 건 공허함과 허무함 뿐이었다. 그때 이 질문은 나에게 한 가지 방향이 되어주었다.
정말로 ‘신’이 있다면,
인간보다 더 높은 존재인 ‘신’이 있다면,
분명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인간을 만들었을 거라고.
지금의 나처럼 방향 없이 표류하는 게 내가 존재하는 목적은 아닐 거라고.
인간은 분명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존재라고.
지금 내가 느끼는 허무함은
감정적인 착각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