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잘 보내셨어요?’
월요일 업무의 시작은 가볍게 이 질문으로 시작한다.
상대는 별 뜻 없이 한 질문일 테지만, 곧잘 나는 무언가 특별한 주말을 보냈음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물놀이를 다녀왔다던지, 좋아하는 뮤지션 공연을 보러 갔다던지, 1박 2일 근교여행처럼 말이다.
‘집에서 넷플릭스 봤어’는 뭔가 창피했다.
이따금씩 '상대가 날 어떻게 볼까' 걱정될 때 속으로 생각한다.
‘주말 동안 집에만 있었다고 하면, 재미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거 아냐?’
’아 나는 재밌고 유쾌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데!’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맴돌다, 이내 언짢아진다.
‘내가 좋으면 된 거지, 아무도 날 이해 못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본인이 느끼기에 진짜 좋은 시간을 보냈다면
사실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그 경험 자체가 본인을 충분히 채우기 때문이다.
오늘이 그랬다.
서점을 방문해 얼마 전부터 읽고 싶었던 ‘어린 왕자’를 읽었다.
두 시간 동안 천천히 음미하며 읽는 동안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런 경험에서는 다른 무엇도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이 충만한 경험이 너무나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머물러 있는 이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처럼 말이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다음 페이지 내용이 궁금했다.
나의 이 경험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했을 때,
상대의 반응이 시큰둥하다면 어떨까?
난 정말 안타깝고 아쉬울 것 같다.
누구나 내가 경험한 것 중에 정말 좋았던 게 있다면,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도 이 감정과 감격을 직접 경험하길 원한다.
그런데, 상대가 이걸 이해 못 한다면?
날 이해 못 해도 상관없다는 마음일까?
아닐 것이다.
‘이거 진짜 좋은데…. 꼭 경험해 봤으면 좋겠는데…’
‘내가 좋으면 된 거지, 아무도 날 이해 못 해도 상관없어!’
타인의 인정이 필요 없다는 말의 뜻과는 다르게,
그 누구보다 그 인정이 필요한 것처럼 들린다.
타인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공허하다는 말이다.
이 말이 방어적으로 들린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상대가 나를 ‘~ 게 봐주는 게’ 느껴지면 비로소 조금 안심이 된다.
하지만 금세 또다시 불안해진다.
왜냐하면 그 구멍은 다른 방식으로 채워지는 것이니 말이다.
순수한 동기로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힘이 세다.
“난 산에 가는 거 좋아해. 숲길을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거든”
“난 에세이 읽는 거 좋아해. 조용히 위로받는 느낌이 들어.”
“난 재즈 듣는 거 좋아해. 정박에 떨어지지 않는 그 묘한 리듬감이 좋아”
하지만 ‘좋아한다’는 이유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인식되기 위해서’처럼
순수함을 벗어난다면 힘을 잃어버린다.
그건 그 대상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그 대상을 이용해 ‘내가 ~게 보이는 걸’ 좋아하는 거다.
무언가를 순수하게 ‘좋아한다’는 건 정말 힘이 세다.
이 강력한 힘을 부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지켜내 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