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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서인간 Apr 09. 2020

아주 짧은 행복의 역사

행복철학사

행복이란 개념은 명백하게 역사적 산물이다. 인간이 만물의 원리를 고민하기 시작한 이후 행복이란 개념도 계속 변해왔다. 잠시 행복의 역사를 훑어보자. 자신이나 주변 사람의 생각이 어느 시대의 '행복' 개념과 유사한지 한번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의외로 봉건시대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모든 서양 철학플라톤 철학주석'이라고 말했다. 행복도 그렇다. 플라톤은 행복(그리스어 Eudaimonia)을 미덕과 같은 개념으로 보는데, 이성과 욕구가 심리적 조화를 이룰 때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행복은 철인이 지배하는 올바른 정치 환경에서만 꽃피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평생 고결한 삶을 유지했을 때 얻어지는 보상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중용을 통해 얻어진다. 비겁과 무모함, 소심함과 뻔뻔스러움, 비열함과 교만함의 중간을 유지하면서 넉넉한 도량을 가져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과 달리 행복한 삶에는 물질적 풍요, 행운 같은 외적인 요인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흔히 향락 주의자로 오해받는 에피쿠로스 학파는 자제력을 강조했다. 이들에게 최고의 선은 쾌락이었는데, 음식 술 섹스 같은 무의미하고 짧은 쾌락을 극복하고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때 진정한 평정심에 다다른다고 여겼다. 실제로 그들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세네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냉정한 평정심을 요구했다. 모든 것은 하늘의 뜻대로 진행되는 더 큰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스 로마 철학에서 행복은 도덕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삶과 같은 의미였다.  


기독교 교회가 지배하는 중세시대에서 행복은 신과 연결되었다. 행복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므로 영원한 행복은 하늘나라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고행이고,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즐거움 쾌락 욕망은 고통이자 죄악이었다. 종교활동을 벗어난 행동에서 비롯된 행복한 감정은 극복해야 할 악덕이었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비로소 행복에 대한 태도에 미미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7,18세기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 행복은 엄격한 도덕에서 해방되었다. 사회는 진보할 수 있고 인간의 본능은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졌다. 홉스, 로크, JS밀, 루소 같은 철학자들은 행복, 욕망, 자유, 의식, 쾌락을 윤리학의 중심에 놓았다. 탐욕과 쾌락의 추구, 감정적이고 성적인 본능의 발견, 신분상승과 유행을 좇는 즐거움에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졌다. 

 

18세기 심리학이 부상하면서 행복의 역사는 전환점을 맞는다. 행복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가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란 생각이 등장했다. 행복은 더 이상 사회적인 개념, 종교적인 개념이 아니라 개인 차원의 개념이 되었다. 과거 서양인들은 행복을 고민할 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랬던 행복에 대한 생각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되었다. 


행복을 도덕이 아니라 개인 심리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등장하면서 정치적으로는 행복 추구권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 헌법에 이 같은 개념을 처음으로 명시했다.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게서 모든 인간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 그중에서도 특히 생명과 자유와 행복추구의 권리를 부여했다는 진리를 우리는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미국 수정헌법 -


벤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도덕과 입법의 근거"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사회 규범이 되려면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이 동의할 수 있어야 하는데, 행복을 객관적으로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헌법에서 말하는 행복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고결한 삶'인가, 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내적 감정'인가.


오늘날 행복은 무엇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 오히려 우리를 딜레마에 빠뜨린다. 도덕적 삶의 표준화에서 욕망의 맞춤화로 달려가는 시대적 분위기가 우리에게 강요된다.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가려는 자유를 향한 이런 흐름은 이미 대세가 되었고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듯하다. 지금도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을 인도해 줄 빛이 무엇인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좌절하고 허우적댄다. 자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과거의 가르침은 도덕적 권위를 하느님이나 하느님을 대신하는 무엇인가에서 찾고 있어 갑갑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지야드 마라 <행복의 패러독스> 중에서-


행복의 역사를 주로 서양 철학사를 통해 살펴봤는데, 이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사회와 분리된 개인이란 개념, 그리고 행복의 추구라는 개념은 사실 동양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다. 동양 철학에서는 개인을 자연이나 공동체와 분리된 존재로 보지 않는다. 개인은 가족, 지역사회, 국가, 종교, 삼라만상 등 공동체와 우주 안에서만 그 존재 의미를 가진다. 이 때문에 '개인의 내적 감정으로서의 행복'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처음 접한 동양인들의 반응은 거부감을 느끼거나 혹은 대단한 매력을 느끼거나, 극단으로 나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림 설명: 전설적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Sagrada Familia 성가족성당)을 그려보았습니다. 1882년 짓기 시작해서 아직도 건축 중인 건물인데요. 20년전과 5년전 방문했을 때 매번 다른 감동을 받았습니다. 가우디 사망 100주년인 2026년에 완공 예정이라는데, 3번째로 방문할 기회가 오기를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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