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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희 Apr 05. 2021

혼자만의 시간

미술관에서 _ 빌 비올라

도대체 왜 이렇게 피곤할까? 아니 몸이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느낌이다. 입안은 부어오르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그대로 누워버렸다. 눈감았지만 시야가 뱅글뱅글 돌았다. 


미술관에 다녀왔다. 세 시간 정도 작품을 감상했다. 미술관을 둘러보는 일은 걷기와 멈춤을 번갈아서 하며 때로는 정지 버튼을 누른 상태가 되기도 했다. 배고픔도 잊고 전시실과 전시실을 이동했고, 가슴 속 우울함과 울컥거림은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환기했다.      



우연히 <빌 비올라, 조우> 展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미술관 홈페이지에 가서 작품 해설을 읽어보고 관람 예약을 했다. 코로나 이전에는 시간적 여유가 있거나 가고 싶을 때 그냥 갔었는데 이제는 약속해야 갈 수 있다. 


예약 없이 현장 관람이 가능한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잊어버렸다. 예약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미술관에 발을 들이는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A5 종이에 관람 시간이 12~14시로 적혀있었는데, 시간이 모자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성향이 초래한 쓸데없는 걱정이다.      



3층부터 관람하라는 안내를 받고 계단을 올라갔다. ‘빌 비올라’는 40여 년간 삶과 죽음이라는 인류의 원초적 사유와 인간 무의식 탐구, 인간의 감정 등을 주제로 영상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다.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 등 이원적인 요소들이 대비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공존하고 순환한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인 줄 알았는데 영상 작품이었다.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작품 속 배우를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읽을 수 있었다. 관객은 추측할 수 있었고 쉽게 비디오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했다. 작품에 따라서 1분 길이가 81분으로 재생 시간이 늘어났고, 45초로 이뤄진 사건이 10분에 걸쳐 펼쳐졌다.     


벽면에는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영상이 재생하는 속도로 한편에서 걸었다. 그냥 따라서 편하게 걸어 보고 싶어서 걸었다. 넓은 정원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다가 멈췄다. 작품 제목이 <행로>다. 


걷는 사람들 표정은 슬픔, 낙심, 체념을 담고 있었다. 키 큰 나무는 검은 그림자로 변했다. 저마다 손에 쥔 것은 보따리로 보였다. 전쟁으로 인해 피난 가는 사람들 모습과 유대인들이 목적지를 모른 채 수용소를 향해 걸었던 걸음이라는 생각이 겹쳐졌다.      


‘행로’라는 단어는 부정적이지 않지만, 지난날 저마다의 걸음으로 전쟁을 피해 걸었을 걸음, 죽음을 향해 걸어갔던 걸음으로 묶어졌다. 포로와 학살과 피난과 고통으로 짝을 짓고 있다. 고단하고 힘든 걸음, 배고픔 속에서 걷는 한 걸음, 걸음은 생각할 겨를 없이 지나갔다.      


<놀라움의 5중 주>에는 한 명의 여성과 네 명의 남성이 있다. 영상 속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표정과 움직임에서 감정이 변하는 상태를 볼 수 있었다. 놀라고, 격하게 반응하고, 기진맥진하고, 체념하고,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느꼈다. 


슬픔이 가득한 배우들의 얼굴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눈물이 흐르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고, 전시실 가운데 놓인 의자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비디오’라는 도구를 활용한 영상 퍼포먼스다.     


프레임 밖으로 나오면 행위 예술이 된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2010년 뉴욕 모마에서 736.5시간 동안 진행한 서사 <여기에 예술가가 있다>로 유명해져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퍼포먼스 예술가 대열에 올랐다. 


퍼포먼스는 마리나가 의자에 앉아있고 맞은편 의자에 참여자가 앉은 후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다. 서로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만으로 참여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격하게 올라오는 감정을 그대로 표출했다. 


공연은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 올레이아 마주하면서 끝났다. 마리나는 연인의 얼굴을 보며 어떤 감정이 제일 먼저 떠올랐을까?      


‘관람객이나 카메라 앞에서 진행되는 마리나의 퍼포먼스 예술은 예술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영적, 감정적 변화를 선사하고 정신과 신체의 한계에 도전하도록 만든다.’(『위대한 여성 예술가들』,19면)     


마리나의 행위 예술은 반복 재생이 불가하다. 관람자는 직접 체험을 선택하고 기꺼이 상대역을 맡는다. 예술가의 정신과 감정을 교류하며 밀접한 친소 범위에서 함께 호흡하면서 자신도 예술가가 된다. 


시선을 상대에게 고정하며 표정과 손짓, 몸짓을 세심하게 관찰한다. 특별한 체험한 관람자는 예술가의 행위를 서툰 방식으로 전하게 될 것이다. 생생했던, 마술 같았던 현장감을 타자에게 전하며 기쁨을 느끼게 된다. 진심으로 느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못한다.      


카메라로 담은 행위 예술이 가진 힘은 가볍게 볼 수 없다. 기계의 힘을 통해 속도 조절을 한다는 발상이 놀라웠다. 감정적 변화와 미세한 표정 변화는 집중하지 않으며 알아채지 못한다. 정지 화면처럼 보인다. 


빌 비올라의 영상 예술과 마리나의 행위 예술은 작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관람객에게 감정을 전달하고, 관람객은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하지만, 또한 작가가 의도한 감정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도록 했다.      


웰다잉 자격과정을 공부한 이후에 죽음과 관련된 그림들과 자주 연결되었다. 『죽음을 그린 화가』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죽음과 삶>, 에곤 실레의 <죽음의 고통>은 작품과 그들의 관계, 좀 더 깊게는 <빈 1900>까지 들어갔다.


전시실 작품의 제목은 이집트 사자(死者)의 서(書), 제목을 문자 그대로 번역한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에서 유래한다고 소개했다. 인간 존재의 개인성, 사회, 죽음, 부활을 탐구하며, 불의 탄생, 행로, 대홍수, 여정, 최초의 빛으로 순환 재생하는 영상 작품이다.      


이미지는 석고 표면에 바로 물감을 칠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프레스코화처럼 스크린이나 프레임 구조 없이 벽면에 직접 투사된다. 전시실 입구 뒤로 <불의 탄생>이 있다. 붉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입구에 있지만 나갈 때 볼 수 있었는데 넋이 빠졌다. 앞서 언급한 <행로, The Path>도 같은 공간에 있다. 작품 <여정, The Voyage> 은 모든 작품 중 스토리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한 노인과 두 사람, 문 앞에 앉아있는 모자 쓴 사람, 강가에는 배가 한 척 있고, 짐을 싣고 있다. 떠남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은 여행을 통해 삶의 존재와 의미를 찾았을까? 행복을 찾아 떠났고 돌아오지 못했을까? 강 건너편 언덕에 놓인 작은 집에 살면서 자신만의 답을 찾긴 했을까? 



오 죽음아, 늙은 선장아, 때가 되었다! 닻을 올리자!

우리는 이 나라가 지겹다. 오 죽음아! 출항을 서둘러라!     


샤를 보를레르의 『악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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