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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rip May 21. 2021

없음 상태

= 무한 가능성


2021 2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의미는 뭘까? 아니 그런 게 있기나 하나?


 서울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친구네 동네로 이동한다. 날이 맑다. 열차가 출발하고 지상구간을 통과하며 햇볕들이 맞은편 사람의 뒤통수에 쌔게 내려 꽂힌다. 창밖으로 바쁜 서울시내의 건물들이 보인다. 고시텔이라는 글자도 보이고 망가진 옛 건물, 시장의 천막들도 간간히.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지금 드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방금 전까지는 ‘생각 없음’의 상태였다. 명상을 할 때나 잠들기 전을 제외하고 하루 중 이런 시간이 얼마나 있었지? 나는 바쁘지 않은 데에도. 친구네 집에 차를 두고 나온 건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 생각 후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생각이 들고, 이렇게 생각하기를 원하는 이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지?

 우리는 막연히 또는 어렴풋이 삶의 어떤 절대적인 의미. 생존의 의미. 우리가 탄생하고 백 년 남짓을 살아가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필히 찾아야 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찾으려 바삐 움직이고 생각하다 우리는 늙는다.


 148억 년 전 우주가 탄생하고 처음 존재하게 된 수소원자들이 영겁의 시간을 거쳐 별이 된다. 그 별은 열심히 새로운 원자들을 만들고 생을 마감하는 순간 이 결과물들을 세상에 흩뿌린다. 그 흩뿌려진 결과들은 시간이 흘러 새로운 것을 위한 재료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재료는 또다시 시간을 지나 지구라는 행성이 된다. 여러 우여곡절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약 30만 년 전 우리는 세상에 나타났다. 대륙의 이동, 환경의 변화, 언어와 문명, 농경, 산업, 에너지를 거쳐 1900년대 막바지에 태어난 나는 지금까지 30년이 조금 안 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대로 ‘운 좋게’ 지속된다면 앞으로 50년가량 더 살다가 다시 지구의 재료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의미는 뭐지? 만약 이것이 절대적인 어떤 존재가 나의 존속을 위해 잘 빚어낸 무대 거나 각본이라면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의 삶은 절대자가 만들어낸 의미이니까.


 그렇게 종교가 탄생했다. 무지로부터 시작된 두려움은 별자리를 만들어내고 신화를 만들어냈다. 횃불을 들고 어둠 속에서 벽을 향해 꾹꾹 눌러 그린 그림들의 내용은 그 당시에 두려워했던 존재들이었다. 동물과 하늘에 의미를 담고 우리는 그들을 존중, 존경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생존했다. 무지막지하게 좋은 두뇌를 갖고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우리는 기억과 예측, 앎으로 성장했고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은 두려워한다. 이것은 우리의 생존 방식에서 오는 아주 당연한 반작용이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둘씩 주변 환경에 의미를 담기 시작했다. 이것은 행동하기에 아주 좋은 기폭제이고 영양제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별은 그냥 있고 파도는 달과의 상호작용이 만드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포세이돈과 크로노스의 능력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그저 재미난 이야기로 여긴다. 더 이상 두려운 현상이 아니니까. 오래전 사람들이 담아냈던 의미들이 사라지는 순간 두렵지 않아 졌다.


 여기서 조금 아쉬운 점은 우리가 미래를 예견하거나   없다는 점이다. 하나  요점은 오랜 시간이 지나 상위 현상들이 이해되는 것처럼 나의 삶의 의미도 언젠간 사라지고 이해될 문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낼 만큼 오래   없는 점이 흠이기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사라지거나 이해되는 것들이라면 지금 구태여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의 바깥에서의 의미는 시간에게 사라진다.


 이 세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고 느끼고 듣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은 내 안에서만 존재한다. 내가 듣는 소리와 그가 드는 소리는 같을 수 없다. 아니 같은지 확인할 길이 없다. 내가 본 사과가 어떤 모습으로 내게 인식됐는지 다른 이들은 확인할 수 없다. 우리는 하얀 바탕에 검을 글씨를 보고 있다고 알고 있는 것이지 실제로 이 것들이 개개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는 ‘나’를 제외한 누구도 알 수 없다. 세상은 안에 있는 것이다.

 

  바깥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의미는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다른 ‘안의 세상’에선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마음’.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드는 고통, 이를 이뤄냈을 때의 성취감, 슬픔, 사랑, 기쁨, 증오, 평안.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만 실제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다. 자유를 위해 떠나는 그는 어떤 절대적인 의미를 위해 그곳에 가는 것이 아닌 그 순간에 존재하며 느껴지는 것들을 위함이다. 우리는 지금에 존재한다. 나를 제외한 어떤 누구도 이것에 의미를 규정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각 객체의 의미를 만들거나, 만드는 방법을 만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뭐든 괜찮다. 어차피 절대적인 의미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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