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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rip Jul 17. 2021

혹한기 : 걸어서 강릉까지 [충청도]

2021.02.19 ~ 02.20


1. 호기로운 출발 [충주 - 삼탄유원지 | 20km]

한국에 돌아온 뒤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고향 충주에 지원사업을 받아 가게를 차릴 준비를 했다(결국엔 건물주의 계약 파기로 무산되었지만).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고 계약 예정일이 열흘 정도 남은 시점. 어느 날 채은이가 산티아고 순례길 영상을 보내줬다. 영상을 확인하기도 전 제목을 보자마자 재미난 생각이 떠올라 바로 일을 계획했다.
대략적인 루트

2월 18일. 한파가 막 시작되는 날, 떠날까 말까 고민하다 시간만 지체하는 기분이 들어 곧바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충주 공용버스터미널에서 강릉 영동대학교까지 총 200km

사실 2022년 10월쯤에 귀국을 할 예정이었던 터라 모교인 강릉영동대에서 충주까지 도보로 여행하는 계획을 좋은 가을날에 해볼까 라고 어렴풋이 생각은 하고 있었다.

비엔나에서 사용했던 70유로짜리 1인용 텐트와 배낭, 가스버너, 부모님이 사용하시던 침낭과 에어매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 산 것 들이다. 다이소에서 산 첫 3일간 사용할 핫팩과 양은냄비, 라면, 누룽지. 벼룩시장에서 털모자와 두꺼운 겨울옷 등등. 80L짜리 배낭에 가득 챙기고는 마지막으로 책 ‘버리고 사는 연습’을 작은 칸에 넣었다. 무게를 재보니 대략 15kg. 줄이고 줄였는 데에도 한참 무겁다. 오늘은 보일러를 아주 쌔게 틀어놓고 와인을 한 병 마셔야겠다.

출발한지 2시간 째

 오후 2시 충주 칠금동에서 출발한 지 2시간 정도 흘렀다. 오는 길에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약 7km 정도쯤 되었을 때 눈이 살살 오기 시작한다. 기상예보로는 내일모레까지는 온다니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 첫 번째 목적지인 삼탄유원지까지는 4시간 정도만 더 걸으면 된다.

가는길에 만난 털복숭이 친구

 길목에 있는 상점에서 키우는 강아지다. 눈발이 꽤 날리는데 사람 소리가 들리니 밖으로 뛰쳐나와 애교를 부린다. 잠시 옷에 뭍은 눈을 털어낼 겸 녀석의 머리도 털어주었다. 나는 겨울이라 겨울옷을 입었고 여름이면 채비를 줄이겠지만 이 녀석은 여름에 깨나 더울 듯싶다.

아직은 여유로움

 이 근방에는 천지인(天地人)의 의미를 담은 세 개의 봉우리 천등산, 지등산, 인등산이 있다. 옛길을 따라 언덕을 몇 개 지나니 지난주 채은이가 아버지와 지등산에 다녀왔다고 이야기하며 추천해줬던 지등산 옆 인등산에 다다랐다. 혼자 신기방기 해하며 찻길을 따라 산길을 넘는데 이거 생각보다 눈이 많이 온다…. KT의 영업용 모닝 한 대가 갓길에 멈추고 영업사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내려 말을 건다.

“여기서부터 계속 오르막길인데 조금 태워다 드릴까요?”

출발하기 전 나름대로 찬스를 만들어왔다. 숙박업소 찬스 1개, 절 찬스 1개, 히치하이킹 찬스 1개. 첫날부터 소중한 찬스를 쓸 수는 없다. 고민됐지만 정중히 거절하니 남자도 의미를 받아들였는지 목례를 하며 지나쳐갔다. 만약 두어 번 정도 더 물어봤더라면 흔들렸을 텐데 속 깊은 청년이구나.

눈이 오고 차가 지나다니면서 길이 얼기 시작하니 오르막길을 걷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챙겨 왔던 등산용 스틱을 꺼냈다. 아직 첫날이라 체력은 짱짱한데 문제는 신발이 젖어버렸다. 도착하자마자 발을 말리고 열기를 쬐면서 쉬어야겠다.

여름엔 민박을 운영하십니다

어찌어찌 눈길을 헤치고 다리를 건너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늘은 첫날이니 무리하지 않았다. 여름철에는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관광지이라 예상대로 주변에 슈퍼가 있어 들렀다. 아무도 없는 길을 눈발을 맞으며 발자국을 만들며 슈퍼로 걸어가니 어디선가 문득 스쳐봤던 일본 영화가 떠올랐다. 오하이오 민나상 요로시꾸 오네가이시마스! 따듯한 오뎅을 상상하며 가게 문을 열었다.

막걸리가 마시고 싶었는데 겨울에는 사람이 다니질 않아 유통기한이 짧은 상품을 진열해두지 않는다고 한다. 물과 참치캔, 소주를 한 병 사서 강가로 내려갔다. 분명 출발할 때 내리기 시작했던 눈인데 어느새 쌓여 바닥을 분간하기 힘들다. 강둑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 아무 길로 내려가다 나뭇잎과 나뭇가지에 발이 쑥쑥 빠져 신발뿐 아니라 바지까지 홀라당 젖어버렸다. 어서 불을 피워야겠다.

꽝꽝 얼어붙는구나

 우선 평탄한 지형을 찾아 주변에 거친 겨울풀들을 싸리비처럼 엮어 바닥을 대충대충 쓸고 텐트를 쳤다. 날은 추웠지만 4겹으로 꽁꽁 싸맨 덕에 티셔츠가 땀에 젖어버려 우선은 빨리 겉옷을 벗고 땀을 말리고 싶다. 텐트 안에 짐을 풀어두고 블루투스 스피커로 차분한 음악을 틀었다. 상의를 가볍게 하고 접이식 톱을 챙겨 땔감을 구하러 갔다. 아까 발이 푹푹 빠졌던 그 내리막으로 가 나무를 챙겨 왔다. 이거 생각보다 여러 번 움직여야겠는데?.. 게다가 벌목한 지 오래돼서 그런지, 눈 때문인지 나무들이 촉촉하다. 아무래도 큰 불은 만들기 힘들 것 같다.

첫날밤

 불을 피우자마자 양말과 신발을 불 옆에 두어 말리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주운 박스를 작은 바위 위에 얹어 앉고 바닥에 두어 자리를 만들었다. 아까 샀던 참치캔을 넣고 라면을 끓이고선 깡소주를 들이키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스위스에서 했던 캠핑 첫날밤이 떠올랐다. 그날도 오늘처럼 사람 하나 없는 산 속이었는데 깡와인을 마시며 어렴풋이 보이는 은하수를 화면 삼아 음악을 들으며 몇 시간 동안이나 상상에 빠져들었다. 매캐한 나무 연기를 맡으며 여러 생각을 하다가 흘러나오는 음악의 가사에 집중했다. Lost stars. 내가 여기 온 이유,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고생을 하며 단단해진다던가 그런 방대한 이유는 아니었다. 늘 그랬듯 단지 재미를 위한 일이었고 나는 지금 재미있다. 그러나 지금에 숨을 쉬며 한 시간 전, 하루 전, 일 년 전을 돌아보면 그에 숨은 의미는 늘 있었고 어쩌면 나의 재미는 무의식에서 이런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일인가 싶기도 하다. 답은 늘 길에 있었고 목적지는 그저 방향을 제시할 뿐이었다.

Where we're dancing in our tears.
And, 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It's hunting season.
And the lambs are on the run.
Searching for meaning.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
띠로리

 너무 무섭다. 강바람이 생각보다 강해 텐트가 날아갈 것 같고 문 앞에 키워놨던 불이 꺼지며 추위가 심해졌다. 주면에 아무도 없고 어찌 됐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 귀찮아서 팩을 안 박았는데 이렇게 된통 혼나네…… 우선 텐트를 정리하고 마을로 올라갔다. 주변에 바람을 피할 곳도 보이지 않고 너무 피곤한 데다가 텐트도 대충 접었던 터라 최대한 빨리 자리를 잡고 싶어 졌다. 다행히 바로 앞 버스정류장이 있어 하루만 신세 지기로 했다. 3면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안정감이 있다. 조금 춥긴 해도 아늑하다.


2. 무지 개떡! [삼탄유원지 - 제천 | 33km]


 오전 10시 30분. 느지막이 눈을 떴다. 나는 원래 아무데서나 잘 자는 편이라 오늘도 나쁘지 않은 밤을 보냈다. 텐트에서 나와 신발을 신으려는데 어젯밤 마을로 올라오는 길에 신발이 다시 젖어 밤새 꽝꽝 얼어버렸다. 꾸깃꾸깃 신어 발의 열기로 녹인 뒤 다시 길에 올랐다.

무지개떡

강물을 따라 북동쪽으로 향했다. 강물이 얼고 흙바닥에 눈이 가볍게 쌓여 여러 색이 겹겹이 레이어드 되어있다. 무지개떡 같다. 예쁘다. 그러고 보니 눈이 그치고 날이 밝네! 오늘은 기운이 좋구나

다른 도시

약 두 시간 정도 더 걸어 제천시에 입성했다! 드디어 첫 번째 도시다. 가지고 있던 물이 바닥이나 민가에서 도움을 조금 받았다. 제천시 표지판, 민가의 도움, 오르막길 끝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내리막을 내려가 보자!

미역라면

 한 두어 시간 걸으면 아무 식당이라도 나오겠거니 했는데 심지어 상점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주민들에게 여쭤보니 차로 30분은 가야 한다고.. 오는 내내 당이 떨어져 챙겨 온 초코바로 연명했는데 물이 다 떨어지기 전에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겠다. 소고기미역국면에 누룽지를 넣어 기가 막힌 한 끼를 해결했다. 어제저녁도 라면을 먹었는데 아직도 진짜 맛있다. 때마침 좋은 쉼터도 발견했겠다 30분만 쉬었다 가야겠다.

데자뷰 아님

 출발한 지 세 시간 정도만에 국사봉 언덕 정상에 올랐다. 멀리서 자그마한 마을과 찻길들이 보이고 그 뒤로 수많은 능선들이 보인다. 바다에는 산이 없으니 강릉까지 가려면 저 언덕과 봉우리들을 다 넘어야 한다. ㅎㅎ

 내려오는 길에 며칠 전 너무나 선명하게 꿈에서 봤던 상태의 차를 발견했다. 차 종도 저렇게 곤두박질쳐져 있는 모습도. 꿈속에서는 홍콩의 아파트 주차장에서 저런 모습이었는데 어쨌든 신기하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5km

잡념을 내려두고 명상과 비슷한 상태로 걷다가 중간중간 지도를 확인하다 보니 웬걸 길을 한참 잘 못 들었다. 저녁 8시쯤 제천시내에 도착해서 잘 곳을 찾아보려 했는데 더 늦어질 것 같다. 의도치 않게 언덕을 두 개나 더 넘었다.

네팔

 오늘 길에 등산스틱이 하나 부러져 대체할만한 나무 막대기를 하나 주웠다. 길이도 적절하고 끝이 부드러워 잡고 있기도 안성맞춤이다. 저 다리를 건너서 4시간만 더 가면 도착이다.

감사합니다

 제천시내 외곽에 도착했다. 오늘은 바람도 너무 심각하고 날씨도 어제보다 더 춥다. 핫팩을 충분히 터트리고 불을 피워놓고 자면 될 테지만 그러기엔 너무 도시까지 들어와 버렸다. 오늘은 절 찬스를 써야겠다. 근처에 보이는 절에 들러 하룻밤을 요청했다.

비엔나에서 거의 매일 마셨던 Ottakringer

했지만 실패했다. 스님들이 단체로 거주하시는 일반 사찰이 아닌 부부가 운영하며 집처럼 지내는 절이라 묵고 가는 건 어렵다고 한다. 방 말고 창고나 주차장. 건물 뒤라도 괜찮다 했으나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거절당했다… 거의 한 시간 넘게 고민하다가 오늘은 자존심을 조금 내려놓고 근처 숙박업소에서 쉬었다가 가야겠다고 결정했다.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한 캔 사고 방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오늘은 한발 물러났으니 내일부터 다시 정진해서 움직여야겠다. 티비로 짱구를 틀었다. 호주의 울룰루를 여행하는 편이었는데 이때 준비하고 있던 가게의 이름이 ‘울루루’였다. 이런 우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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