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1~02.23
어제는 여관방에서 뜨듯한 물로 샤워도 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피로를 풀었다. 여기서부터 강원도 입구까지는 국도를 통해서 걸어가야겠다. 의천이한테 연락이 온다. “야 거기 차량 전용 도로잖아” 표지판을 보니까 이륜차, 소형 전기차, 자전거는 통행금지란다. 도보는 따로 표기되어있지 않으니 그냥 가야겠다. ㅋ
제천시청을 지나 국도로 진입했다. 두어 시간 정도 걷다가 잠시 쉴 겸 풀밭에 앉아 초코바를 하나 까먹다가 버려진 고무망치를 하나 주웠다. 지난 삼탄유원지에서 바람에게 호되게 혼났던 기억이 떠올라 가방 옆구리에 장착했다. 필요한 건 자연에서 전부 구할 수 있다는 생존 전문가의 말처럼 나는 고무망치를 자연에서 구했다.
이제부턴 강원도다. 걸어서 도를 이동했다니.. 저 표지판을 봤을 때 감격은 계속해서 담아두고 싶다. 혼자 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방방 뛰었다. 이제 25% 정도 왔다. 생각보다 금방이네.
나무주사를 놓느라 2008년 말까지 솔잎 채취를 금한다는 표지판이다. 사회를 한 발자국 떨어져서 관찰하다 보면 가끔 시간이 멈춘듯한 것들을 발견한다. 골목길의 연탄가게, 복잡하게 엉켜있는 전신주, 버려진 의자.
어느새 토쿄까지 왔다. 일본은 날이 추운지 물병이 자꾸만 얼어붙는다.
마땅히 잘 곳을 못 찾다가 지도에서 작은 강가를 발견했다. 큰 다리도 옆에 있어 바람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자리를 폈다. 쌓여있는 흙더미를 바람막이 삼아 텐트를 쳤다. 때마침 주변에 지지대로 썼던 나무가 버려져 있어 30분가량 열심히 톱질을 해 땔감을 넉넉하게 준비했다. 오늘은 날씨도 많이 춥지 않고 해가 지기 전 일찍 도착한 덕에 책을 읽을 좀 읽으려고 한다.
+ 알고 보니 흙더미가 아니라 소똥 더미, 겨울이라 냄새는 안 난다.
저자는 말한다. 미니멀리즘이란 진정한 의미에서는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명확하게 아는 것’이라고, 이는 늘 상황에 따른다. 지금의 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충분한 양의 땔감과 소똥이다. 이번 여정을 마치고 도시에 돌아가면 또 필요한 것이 생길 것이다. 아니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강요당할 것이다. 거리의 수많은 광고판과 대중매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필요하게 만든다. 심지의 우리의 열망이나 욕구 또한 나의 것이 아닌 3자의 욕망이나 욕구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나의 주관적인 가치판단으로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는지 선택하는 것이다. 가득 채운 마음은 즐거움을 온전히 받아들일 공간이 부족하다. 약간 모자라고 약간 여유롭게. 배가 고파야 배가 부를 수 있고 졸려야 잠을 잘 수 있다.
예전에 어머니가 병상에 계셨을 때 아버지가 귓속말로 이야기하는 것을 엿들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생각해”, 이후 삶에서 무기력이나 좌절을 겪고 있을 때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하는 말이다. 늘 주변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속내를 털어놓을 때 이 말을 인용하곤 한다. 하나 불안정한 시기를 겪고 있는 나는 오히려 때때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조급해진다. 누군가 옆에서 쳐다보고 있고(내게는 강박이), 때문에 더 열심히 하려다 보면 더 실수하게 되는 것처럼 나는 스스로를 불안에 몰아넣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간에 살고 각자의 걸음과 속도로 걸어간다. 가끔 넘어지면 겸사겸사 앉아서 고무망치도 줍고 초코바도 하나 먹으면 된다. 이 강박 때문에 소중한 고무망치를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다. 작은 불씨, 주머니 푼돈, 마음 담은 편지, 좋은 대화에서 받은 감동을 일상에 녹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오늘은 조금 이르게 9시쯤에 기상했다. 평창군을 살짝 지나쳐가는데 길목에 ‘동막골 마을’이 있다. 오늘은 이 마을에 들러서 하루 묵고 가야겠다.
연당교에서 올라와 평창군 방향으로 걸었다. 출발한 지 30분 만에 편의점을 발견했다. 여분의 핫팩을 조금 더 사고 보조배터리를 충전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일어난 김에 커피를 한잔 마셔도 괜찮을 것 같다. 햇볕을 맞으며 편의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아! 문명의 맛! 화장실도 이용해야겠다!
아주 귀여운 슈퍼를 발견했다.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아마 물건을 판매하시는 건 아닌 것 같고.. 독특한 폰트로 쓰인 글씨가 재미나다. 일본어인 줄 알았는데 둥글둥글한 한자와 한글이네.
오다가 재미난 표지판을 봤다. ‘스트로마톨라이트(5억 년 전 화석 지층) 전방 1km’ 한 번 들려봐야겠다.
예전에 유튜브에서 ‘호주에만 있는 바다화석!’이라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여기서 우연히 발견했다. 더 정확하게는, 호주에서는 ‘살아있는’ 형태이고 여기는 과거에 퇴적된 지층들인 것이다. 4~5억 년 전 캄브리아기에서 오르도비스기 사이쯤에 물 밑에 쌓인 퇴적물에 붙은 남세균과 같은 생화학적인 부착물들이 근처 유기물질들을 세포막을 끌어당겨 한층 을 이루고, 그 위에 다시 남세균이 붙어살게 되면서(나무 위키) 나이테처럼 층을 이루게 된다. 당시 지질학 정보들을 잘 보존하고 있어 학술적으로 가치가 뛰어나다. 신기방기
오이와 통조림 콩, 통조림 옥수수가 올라간 옛날 짜장면이다. 평창군 북면 어떤 마을에 잠시 들려서 먹었는데 동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점심을 먹고 다시 길에 올랐는데… 이제부턴 끝도 없이 오르막길이다. 산으로 오를수록 식은땀이 나고 어질어질하다. 당이 떨어지는 기분이다. 아무래도 조금 쉬어야겠다. 조금 더 고개를 오르니 작은 펜션이 하나 나왔다. 1층에 작은 슈퍼에서 이온음료를 하나 마시면서 아저씨와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같은 날씨에 여기 다니면 위험해요. 이제부터 계속 오르막 내리막일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강원도는 역시 험준하구나. 30분 넘게 쉬고선 다시 길을 향했다.
드디어 고개에 올랐다. 몇 킬로미터 오르막길 몇 킬로미터 내리막인 길을 계속 걸으니 무릎에 무리가 온다. 약간 무릎 연골이 배낭 무게에 눌려 납작해지는 느낌이다. 허리는 요대를 착용해서 무리 없었지만 무릎은 미쳐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 배운 점, 오르는 게 내려가는 것보다 수월하다. 뒤로 걸으니 무리가 조금 덜한 것 같다. 배낭 무게 때문에 넘어질 것 같은 것만 빼면
동막골 마을이다. 원래는 이 마을에서 묵어가려 했는데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해서 내친김에 조금 더 가보려고 한다. 한 두어 시간 거리에 미탄리라는 동네가 나온다. 아무래도 무릎을 보호할 붕대를 사야겠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금세 깜깜해졌네… 마을 입구에 때마침 약국이 있어 붕대를 두 개 사 주머니에 넣었다. 동네를 몇 바퀴 걸으며 구경해봤는데 문을 연 가게는 3개, 사람도 거의 없다. 동네 분위기가 마치.. 어렸을 때 포켓몬스터에서 봤던 슬리피의 마을 같다. 사람은 없고 전부 마네킹. 텐트 자리를 찾으러 더 돌아다니다가 어린이집을 발견했다. 내일은 토요일이니 아이들이 등원하지 않을 것 같아 초인종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지금 여행하고 있는 중인데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여기 앞에 주차장에서 텐트 좀 펴도 될까요?”
/어.. 네 물론이죠. 근데 화장실이나 뭐 그런 건..
“아 괜찮습니다! 어차피 아침에 또 바로 나갈 거라서요!”
/네!
말이 끝나자마자 텐트를 쳤다. 짐을 내려놓고 식사를 하러 가야겠다. 주변에 민가도 있고 같은 건물에 사람들도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강가, 노지, 사람 없음 < 다리 밑 < 민가
자 다시 또 다른 고개다. 고개를 하나 넘으면 마을이 하나 나오고 그러면 하루가 가는 것 같다. 오늘은 정선까지! 가다 보니 터널이 많이 나온다. 터널에서 소리가 울리는 게 재미있어 원피스 주제가를 불렀다. ‘내 어린 시절 우연히! 들었던! 믿지 못할 한 마디! 이 세상을 다 준다는(중략..)’ 오르막길에 힘이 다 부쳐 노동요로 ‘바람의 노래’도 불렀다. 가사를 곱씹으면서 부르다가 울컥..
붕대를 대충 감고 한 손에는 알루미늄 스틱, 다른 한 손에는 나무막대를 들고 걸어 다니니 조선시대 보부상들이 떠올랐다. 그 시절 보부상들은 짐을 정말 한가득 싣고 천으로 만든 옷과 짚신으로 포장도 되지 않은 산길을 다녔을 텐데… 대단하다.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떠나는 수험생이나 왕의 전령을 전하러 다니는 군인들, 친구나 가족을 만나러 다른 고을까지 이동하는 사람들. 다 이런 식으로 지역을 이동했을 것이다. 약간.. 핸드폰 번호 외우는 능력을 까먹는 것처럼 우리는 또 다른 능력을 까먹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선이다! 예전에 강릉에서 학교 다닐 때 강원랜드로 다들 취업 가곤 했었는데 나는 이번에 처음 왔다. 갑자기 학교 사람들 생각이 나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나 강릉 가고 있으니까 도착하면 보자! 잠시 갓길에 앉아 낮잠을 조금 잤다. 하얗게 달도 보인다. 아마 출발했던 날보다 더 커진 듯하다. 첫날 삼탄유원지에서는 별이 많았는데 오늘부터는 좀 덜하려나.
여름철에 물놀이 하기 딱 좋은 동네다! 주차하기도 편하고 사람도 없고 조용하다. 수심이 편평한 것 같아 강아지들 데리고 와도 괜찮을 것 같다. 글 쓰고 있는 지금이 7월 중순인데 8월쯤에 채은이랑 채은이 동생 데리고 한 번 다녀와야겠다.
‘작업반경내 접근금지’ 푯말을 주웠다. 가방에 잘 붙여서 메고 다니면 웃길 것 같은데 생각보다 무겁다. 터널 입구 바리케이드에 붙여놓고 왔다.
정선 시내로 들어오는 길 사진을 안 찍었나 보다. 꽤 예뻤는데 아쉽구나. 무튼 정선에 도착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날이 따듯해서 패딩은 가방에 넣어두고 바람막이 차림으로 다녔다. 내일은 목적지인 아우라지에서 며칠 있을 예정이라 에라 모르겠다 하고 숙소를 찾아다녔다. 시내 입구를 통해 5일장이 열리는 아리랑 시장까지 쭉 걸어오다가 꽈배기 집을 발견해 하나 사 먹으며 여쭤봤다. “근처에 저렴하게 묵고 갈 만한 숙소가 있을까요?” 아주머니는 바로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저기 있네요^^’ 하신다. 슬쩍 구경해봤는데 너무 마음에 든다. 하루에 2만 원이라니 오늘도 조금 편하게 쉬어야겠다.ㅋㅋㅋㅋ
아주머니가 발 냄새가 난다고 얼른 씻으라고 하신다. 친절하게 슬리퍼와 수건도 빌려주셨다. 땀으로 젖은 몸을 샤워하고 내피로 입었던 트레이닝복 바지와 바람막이만 입고 거리로 나왔다. 바로 옆에 시장이 있으니 막걸리나 한잔 해야겠다.
시장을 구경했다. 쓸 일이 없던 마스크를 꺼내 쓰고 여유롭게 걸었다. 아이들도 보이고 상인들도 보인다. 확실히 강원도로 들어오니 맛있는 음식들이 많이 보인다. 부꾸미, 콧등 치기, 전병 등등 나는 거친 곡물, 이를테면 메밀이나 보리, 수수로 만든 음식들을 좋아한다. 꼬시~하이 쳐 찍이네! 더덕으로 만든 제품들도 간간히 보인다. 나는 포장마차 천막으로 천장을 댄 전집에 앉았다. 모둠전과 정선 막걸리를 마시면서 아주머니와 간단한 대화를 했다. 알고 보니 어제 원주와 구절리(정선군 여량면 구절리)에서 큰 산불이 났다고 한다. 오는 길에 헬리콥터를 몇 대 봤는데 아주머니 말로는 산불때문이란다. 내일 아우라지에서 3일 동안 캠핑을 할 계획이었는데 이거 문제다.. 딱 구절리를 관통해서 지나가야 하고 이미 이틀 동안 진압을 못하고 있다니 조심하라고 하신다. 덧붙여 요즘 같은 환절기에는 강원도 바람이 심한데 정선을 기점으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심해진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엄청난 정신력.. “나는 모기에 물려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특별히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다.” 역시 육체를 지배하는.
할머니 집처럼 따듯하다. 오랜만에 온돌방에 앉아서 구겨진 벽지를 구경했다. 저 티비 선반도 이불 냄새도 정겹다. 채은이도 이런 바이브 좋아하는데 다음에 꼭 데려와야겠다. 같이 시장에서 막걸리 마시고 동네 구경하면 재밌겠다. 빠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