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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rip Jul 26. 2021

혹한기 : 걸어서 강릉까지 [강원도 pt.2]

2021.02.24~02.25

1. 모래마을 닌자 [정선 - 아우라지 | 20km]

콧등 치기

 잠자리가 편한 덕에 조금 이르게 눈이 떠졌다. 잠은 넉넉히 자야 한단 생각으로 보통 10시쯤 일어났는데 오늘은 8시, 여유롭게 짐을 꾸리고 바로 옆 아리랑시장으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면발을 후루룩 빨아들이면 단단한 메밀반죽면이 콧등을 때리는 ‘콧등 치기’ 따듯하게 속을 채우고 길을 떠났다.

cheers mate!

 어딘지 고민이 많아 보이는 안전요원 친구. 근심 가득한 표정과 많은 수난을 겪은 것 같은 옷차림

 오늘은 하나 남은 등산스틱마저 부러졌다. 다행히 근처에 적당한 길이의 쇠 막대기를 발견했다. 왼손으로 땅을 짚으면 둔탁한 나무소리가, 오른손으로 땅을 짚으면 날카로운 금속소리가 난다.

어미와 새끼소
작은 마을, 마을만 들어오면 길을 잃는다

 정선에서 아우라지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초등학교를 구경하고 주민들 생활도 엿보며 산책하다가 길을 또 잘못 들었다. 조금만 돌아가면 되니 여유롭게 구경하자. 새로 닦은 도로에 요즘 것으로 보이는 어린이 보호 구역 방지턱과 상반되는 좁은 길과 오래된 주택들, 재미나다.

 멀리서 하나로마트가 보인다. 농협 로고가 보일 때마다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하나로마트는 정말 어디에나 있구나.. 점심으로 사과 하나와 프로틴 바를 먹었다.

궁금하다

웰빙(well-being)이 아닌 웰다잉(well-dying)을 배우는 문화연구소다.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려나, 궁금하다. 생각에 빠져 걸어가던 도중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씩 죽어간다는 말을 어디서 본 적이 있다. 잘 죽는 방법은 다시 말해 잘 사는 방법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영생하지 않고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완벽한 조화보다 시들기 직전 만개하는 벚꽃을 사랑하고 로봇 강아지보단 언젠간 무지개다리를 건널 ‘묭이’를 사랑하는 이유다. 우리가 오늘과 지금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며 모든 삶이 존중받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윤동주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해야지!” - 김채은

아우라지

 아우라지에 도착했다. 내일은 강릉에서 대학 동기이자 호주를 함께 여행했던 ‘원석’이가 놀러 온다. 때마침 휴무일이라 바람도 쐴 겸 오랜만에 얼굴을 보러 마중 나온단다. 같이 하루 캠핑을 할 계획이라 미리 자리를 봐 뒀다. 2km 정도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오지만 사전 답사 겸 먼저 하루를 보내봐야겠다.

 강가로 내려오는 길목에서 캠핑카로 여행하시는 부부를 만났다. 주말이라 숨을 돌리러 오신 이들은 놀랍게도 충주에서 오셨단다. 약 일주일 전 출발했던 칠금동에 사신다는데 감회가 새롭다. 이 분들은 잠시 뒤 충주로 돌아간다.. 태워주세요.

이거 원..

 아우라지는 사투리로 ‘어우러진다’라는 뜻이다. 두 갈래의 강이 만나 한 줄기가 되는 이 지형은 바람이 세차다. 며칠 전 났던 산불이 진화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인스타에 영상을 올리니 아우라지가 고향인 친구가 DM을 보냈다. ‘야 거기 바람 많이 불어서 못 잘 텐데, 물놀이 하긴 좋아!’

텐트를 칠 수가 없다. 돌멩이와 가방으로 텐트 천을 눌러두고 낑낑대며 골격을 완성하고 들어 올리자마자 돌풍에 날아간다. 왼쪽 사진에 보이는 나무들은 거의 가시나무다. 바람에 날려 텐트가 찢어질까 꽉 붙들고 있으면 다시 바람에 지지대가 부러질 것 같다. 연을 날리듯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붙잡고 바람을 타고 움직였는데 거의 30m는 날려간 것 같다. 정말 농담이 아니라 무기력하게 끌려갔다. 사진 뒤편에 보이는 숲까지 다다라서야 바람이 그쳐 급하게 텐트를 접었다. 다시 돌아와 보니 가방과 소지품들이 나뒹굴고 모래에 파묻혀있다. 생각보다 문제가 크다.

잇몸에는 이가탄!

 그래서 오늘은 텐트를 안치고 잘 계획이다. 주변에 죽은 나무도 많고 바람이 많이 불긴 하다만 차갑진 않다. 기상예보를 보니 새벽 기온도 영하로 떨어지진 않으니 불을 피워놓고 그냥 자야겠다. 친구 ‘의천’이와 12월에 강가 노지에서 이러고 잔 적이 꽤 있었는데 버틸만했다. 바람을 등지고 자면 괜찮을 것 같다.

우라노스, 화성, 달

 바람이 심하니 나무가 빠르게 탄다. 아직까지 춥지는 않지만.. 무섭다. 오늘은 잠도 푹 잤고 20km밖에 걷질 않아서 피곤하지 않은 게 화근이 됐다. 차라리 밤늦게 도착해서 간신히 불만 피워놓고 곯아떨어졌으면 괜찮았을 텐데.. 달이 밝아 강물과 거대한 바위가 눈에 보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소리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잠시 허리를 펴고 앉아서 주변을 돌아보니 적막함에 공포가 더해진다. 영화 ‘그래비티’가 생각났다. 인간의 공포는 대부분 무지에서 오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이나 감상하는 우리는 그 끝도 없이 펼쳐진 공간에 원초적 공포를 느낀다. 대자연에 맨몸으로 홀로 던져진 나는 너무 나약하다. 명상을 해야겠다. 현재시간.. 고작 오후 8시

구해줘!

“원석아.. 혹시 퇴근하고 바로 올 수 있냐.. 너무 무섭다ㅋㅋㅋ”

SOS를 쳤다. 원래는 내일 아침에 운동을 다녀와서 장을 보고 넘어온다는 걸 10분 넘게 설득해 호출을 했다. 퇴근하고 씻고 대충 필요한 것만 사서 오면 11시쯤 도착할 것 같단다. 그동안 나는 화로를 만들고 장작을 더 구해놓기로 했다. 정성스럽게 고른 돌멩이로 의자를 만들고 불씨를 잘 살려뒀다. 공포가 끝났다는 사실에 혼자 들떠 춤을 췄다.

오후 11시, 멀리서 상향 등을 반짝이는 자동차가 한대 들어온다. 등대다. 짐을 풀고 식사를 준비하는데 이 친구 고기를 구울 그릴을 안 챙겨 왔다. 근처에 편의점은 당연히 없고 시간도 많이 늦어 슈퍼마켓도 문을 닫았을 것이다. 차를 타고 아우라지 읍내로 들어갔다. 아직 영업을 하는 한 식당을 발견했지만 그 가게에는 일회용 석쇠는 없다고 하신다. 조금 더 동네를 구경하다가 정말 운이 좋게 버려진 프라이팬을 하나 구했다. 진짜 상황이 약간 미친 것 같은데, 우선 다시 강가로 돌아와 깨끗하게 닦고 고기와 파를 구웠다. 원석이 어머님이 나 고생하신다고 고기를 3kg이나 챙겨주셨다. 너무너무 고마우신.. 조만간 강릉에 가서 같이 식사를 해야겠다. 이날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20살,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던 강릉, 학교, 친구들부터 호주, 코로나 이후, 앞으로.


2. 술! [아우라지 - 아우라지 0km]

덕분에 잘 잤다

아침이다. 건장한 남자 둘이 트렁크에 끼여 잔 것 치고는 아주 푹 잘 잤다. 강원도에 들어서부터 소나무가 많이 보였는데 아침 바람에 흔들리는 게 아주 예쁘구나.

 아침으로 읍내에 있는 중국집에 다녀왔다. 아침부터 고량주 한병 씩 마시고 알딸딸한 채로 동네를 구경했다. 식당이고 매점이고 전부 장사 중인데 거리에 사람만 없다. 얼마 전에 동네에 확진자가 다녀왔다는 소식 덕인가보다. 전에 포켓몬스터에서 봤던 마네킹 마을 같다. 마구 뛰어다니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오히려 자연에서 느끼는 자유보다 더 짜릿하다. 약간 올림픽대로에 누워있는 듯한 느낌!

주민들

사람이 없으니 동물들이 거리로 나온다. 심지어 닭 가족들도 거리를 활보한다. 정말 신기한 하루

시원한 강가

 다시 강가로 돌아왔다. 날이 따듯하니 조금 씻어야겠다. 물가에 가 양치를 하고 발을 닦았다. 물은 아직 얼음장이구나. 발이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웠지만 정신이 번쩍 들어 개운했다. 수건을 널어두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벼운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음악 취향이 비슷했던 원석이와 자주 들었던 음악들 시끄럽게 틀어놓고 시골길, 산길을 달리며 속을 풀어냈다. “어렸을 적 파란 밤 달빛! 내리는 거릴걷다가 한 소년을 바라보다 벼락 맞았었지!!! 그건 아마 어린 나에겐 사랑인 줄도 모르고! 가슴만 저려오며 파란 달만 쳐다보았네에ㅔ”

 다시 트렁크에 누워 음악을 들었다. 각자 좋아하는 음악을 하나씩 들으며 따라 부르고 흔들흔들 춤도 추다가 산들거리는 바람을 쐬며 낮잠을 시원하게 잤다.

왕큰불!

 원석이가 관심 있어하는 친구가 놀러 오기로 했다. 강릉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릴 테니 그동안 자리를 만들어놓아야겠다. 어제 날아가는 텐트에 실려다가 발견한 죽은 나무들을 잔뜩 챙겨 왔다. 불을 피워놓고 조금 기다리자 그 친구가 도착했다. 오늘은 큐피트가 돼야겠다.

 강물에 담가뒀던 남은 고기들을 꺼냈다. 어제 사용했던 프라이팬에 파를 굽고 새로운 친구가 사 온 석쇠에 고기를 구웠다. 음주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재미난 게임을 제안했다.

 ‘스토리 게임’ 한 명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상상력을 키우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놀이이다. 예컨대 내가

“어젯밤 그 나무는”이라 운을 띄우면 다음 사람이 “추위에 떨고 있었어요” 라며 말을 만드는 식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자연스레 원석이가 고백할만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어물쩡 어물쩡 거리다가 결국 실패. 지금은 좋은 친구로 남아있다. 어쩌다가 모두의 가족들과 통화까지 했다. 아주 길고 재미난 밤을 보냈다. 오늘은 날이 좀 차니 핫팩을 몇 개 터뜨리고 자야겠다. 내일은 점심을 먹고 다시 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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