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6 ~ 02.27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추웠다. 나는 ㄱ자로, 원석이는 ㄴ자로 몸을 구부리고 테트리스처럼 맞물려 잠에 들었다. 추위와 불편함에 새벽에 몇 번 깨긴 했지만 그래도 안전하게 잘 잤다! 10시경 느지막이 일어나 사용한 물건들을 정리하며 짐을 꾸렸다. 지금까지 잘 사용하던 양은냄비가 사라진 걸로 보아 어젯밤 누군가의 실수로 쓰레기통으로 갔나 보다. 이제 이틀만 더 가면 되니 그냥 없는 대로 떠나야겠다.
강릉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녀석은 먼저 떠났다. 덕분에 이틀 동안 마트도 편의점도 편하게 이동했으니 이제 다시 내 몫을 할 차례다. 왜인지 다리가 다시 저려오는 느낌.. 배낭이 원래 이렇게 무거웠나. 무튼! 조금만 더 가면 강릉이다!
이번 여행에서 저 녹색 이정표의 역할을 다시 봤다. 이제 익숙한 지명들이 보인다. 왕산면, 커피 박물관..
“어이! 이리 좀 와봐요”
/네?
“일로 일로”
강릉시에 입성하자마자 만난 분들이다. 사람 하나 없는 시골길에 봉고차 두대가 서있고 바쁘게 뭔가를 따르고 계셨다. 지나가는 나를 불러 세우시더니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담고 있던 액체를 한 사발 담아 주신다. ‘’오? 이거 고로쇠인가요?’’ 그렇단다. 보통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사람들은, “어디 가는 중이냐, 뭐하는 사람이냐, 왜 이러고 있냐” 물어보던데 이 분들은 쿨하게 도움만 주시는구나. 대강 행색을 보니 알 것 같다는 표정이기도 했고.. 뭐 아무튼 처음 마셔보는 고로쇠 수액은 아주 좋은 기억으로 남겨졌다! 날이 조금 풀리는 데에도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강가는 아직도 얼어있구나
배고프다. 해가 벌써 다 떨어져 가고 목적지까지는 1시간가량 남았다. 오는 길에 마을에 들리지 않아 슈퍼나 편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남은 초코바로 허기를 달래며 왔는데 슬슬 물도 떨어지고 배고픔도 해결이 안 된다. 도착지에 식당이 하나 있는 걸 지도에서 확인했다. 작은 구멍가게도 있는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가보자.
마을에 도착했지만 불이 켜져 있는 건물은 하나도 없다. 지도에 적혀있던 구멍가게는 3년 전 문을 닫았고 식당은 일찍이 영업을 종료했다. 멀리 하나로 마트가 하나 보였지만 역시나 불이 꺼져있다. 지금 고작 7시밖에 안됐는데.. 거리에 보이는 주민들에게 물어봤지만 다른 슈퍼는 없다고 한다. 망했다. 비상용 라면이 하나 남아 냇가에서 물을 떠 끓여 먹을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냄비도 잃어버렸다.. 흠
우선은 바람을 피할 겸 한 초등학교 앞 정류장에 앉아서 생각을 했다. 비상용 라면을 부숴먹고 조금 남은 물을 마시고 자야 하나, 우선 오늘은 넘어가겠지만 내일 강릉시내까지 가는 길에 다른 상점이 없는 것 같아 고민을 시작했다(지금 생각해보니 아침에 하나로마트에 가서 필요한 것들을 사면 되는데). 버스정류장에 시간표를 구경했다. 15분 뒤면 강릉으로 가는 버스가 온다. 1200원만 내면 30분 만에 편하게 목적지에 간다. 마음이 약해진다. 잠에서 깨면 가장 자고 싶고, 휴가에서 돌아올 때 가장 휴가를 가고 싶은 것처럼. 그래도 지금까지 온 길이 아까우니 조금만 더 앉아있어 봐야지.
맞은편에 자동차가 한대 선다. 강원도에 들어서면서 많이 보였던 ‘산불조심’ 깃발을 단 순찰차량이다. 다가가서 말을 걸어야겠다. 등산 스틱으로 쓰고 있던 나무 막대기와 쇠막대기를 내려놓고 최대한 위협적이지 않아 보이게 다가갔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으로 운을 뗐다.
“안녕하세요! 혹시 주변에 마트나 슈퍼마켓은 없을까요?(주작 의혹)”
/네.. 가장 가까운 편의점이 차로 20분은 가야 해요.. 어떤 것 때문에 그러세요?
상황을 설명했다.
/아! 차에 컵라면이 좀 남아있는데 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혹시 끓일 물은 있으세요?
다시 상황을 설명했다
/아! 때마침 뜨거운 물도 좀 남았는데 잠시만요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차를 딱 한대 만났는데 때마침! 컵라면이 차에 있고, 때마침! 보온병에 뜨거운 물이 있다니!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컵라면을 받아 정류장에서 먹고 있는데 다시 다가오신다.
/이것도 좀 드세요.
온기도 배부름도 결국엔 사람이구나! 꽝꽝 얼어붙은 물병의 물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초등학교로 들어가 마지막 밤을 준비했다.
아침이다. 밤새 내뱉은 숨으로 텐트 천장에 얼음이 가득 꼈다. 핫팩이 수명을 다했나 보다. 처음으로 추위에 벌벌 떨며 일찍이 눈이 떠졌다. 짐을 챙길 생각도 안 하고 주변에 나뭇가지들과 신문지를 모아 작은 불을 피웠다. 정말 너무 춥다. 어젯밤, 바람막이용으로 분교 작은 건물 옆에다가 텐트를 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건물 문을 열어보니.. 활짝 열린다. 장판도 깔려있고 방도 있다. 버려진 것 같지는 않고 여름철 이곳에 캠퍼들이 모일 때 관리자들이 휴식하는 공간인 것 같다. 바로 옆에 아늑한 공간을 두고 바보같이 돌바닥에 텐트를 치고 자다니. 허무함과 안도감에 건물로 들어가 휴식을 했다. 9시, 하나로마트가 영업을 시작하자마자 달려가 빵과 따듯한 두유, 물을 사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다시 짐을 꾸려 떠났다.
지난번 제천의 한 고개 정상에서 강릉 쪽을 바라보며 “저 봉우리를 다 지나야 도착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고개에 올랐다. 더 이상 오를 고개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이 내리막만 지나면 도착이다! 굿굿!
오늘은 마지막 날 답게 여유롭게 움직인다. 가는 길에 보이는 작은 숲에 들어가 점심식사를 했다. 참치캔과 카스타드. 그냥 남은 음식으로 때우는 건데 이게 은근히 맛있다. 생각보다 조화로움! 빈 참치캔을 카스타드 봉투에 넣고 다니다가 바지에 기름을 흘렸다. 시간도 남고 핸드폰 배터리도 남아 숲에 누워 음악을 틀고 햇살을 맞으며 낮잠을 잤다. 문명이 시작되기 전 인류에게 겨울은 어땠을까. 동굴이나 움막에 숨어 몇 달 동안 추위에 떨다가 서서히 바뀌는 계절에 햇볕을 맞으며 축제를 한껏 즐겼을 테지, 아침엔 그렇게 벌벌 떨었는데 지금은 반팔을 입고 바닥에 누워있다. 고대 문명이나 종교들이 태양에 막강한 의미를 부여했던 이유들을 생생히 느끼는 중이다. 태양숭배 1번, 30번 반복합니다.
물이 정말 맑고 깊다. 다음에 물놀이를 하러 놀러 올까 했는데 바로 옆에 붙어있는 ‘상수도 보호구역’ 표지판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아쉬운 대로 얕은 물가에서 치카치카를 했다. 이제 문명으로 돌아갈 시간!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없지. 쨌든 도착했다! 붕대와 요대를 풀러 가방에 정리하고 다시 하얀 천 마스크를 꺼냈다. 막대기들은 택시 승강장 옆쪽에 버려뒀는데 다음에 강릉 놀러 가면 찾아봐야겠다. 재밌겠다.
게 누구요?
영동대 도착 1시간 전, 점점 익숙해지는 도로 모양에 신이나 흥헐거리며 걷다가 누군가 달려오며 말을 걸어왔다. 서울에서 출발했다는 도보 여행자들이다. 캬. 지금까지 여행자들을 못 만나 아쉬웠는데 도착 직전에 만나다니. 목적지는 ‘송정해수욕장’이란다. 군대를 전역하고 해이해진 정신을 바로잡고자 여행을 시작했다는 친구들. 하루에 50km씩 걷고 대관령을 넘어왔단다. 대단하구나.. 나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이제 택시로 이동을 할 계획인데 동행할지 물어봤다. 어제 대기리에서 버스를 탈까 고민했던 게 생각나서 선뜻 물어보기 힘들었지만 이대로 헤어지기는 너무 아쉬웠다. 다행히 영동대-송정 거리와 시내-송정 거리가 비슷해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떡볶이를 먹으러 가야겠다!! 강릉에 올 때마다 들리는 ‘여고시절’ 정말 지구에서 가장 맛있는 떡볶이 집이다. 저기 오른쪽 친구 앞에 보이는 컵에는 물이 아닌 소주가 들었다. 음주를 좋아하는 이 친구는 아주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한 병 사 와버렸다!! 아주 재미난 사람들을 만났다.
시간이 조금 남아 남대천 강가에 앉았다. 아까 마시고 남은 술을 병나발로 마시고 그 친구(사실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미안ㅎ)가 가지고 다녔던 시가를 태우며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에서 온 이 친구들은 눈가를 촉촉이 적시며 강가에서 이런 자유를 느끼는 게 처음이라고 말한다. 한강에서 시가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면 눈초리를 받을 테니. 답답한 일들이 많이 있었나 보다. 이 친구는 자연스레 낭만을 이야기한다. 노을이 지며 강물이 이글이글대고 알딸딸한 기운에 좋은 음악을 들으니 응어리가 해소된다고 이야기한다. 덩달아 나도 마음이 풍족해졌다. 예전에 사바이 가든의 ‘신’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학교 2학년 시절에 알바했던 생활맥주에 들렀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몰래 들렸는데 마스크 때문인지 처음 몇 초 동안은 못 알아본다. ㅋㅋㅋㅋ 나름 작은 깜짝 이벤트인데 성공했다. 대학생 시절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영감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아주 사랑스러운 우리 사장님 내외는 언제나처럼 반겨준다. 땀냄새난다고 뭐라 하긴 했지만서도..
“20대에는 말이야, 당장 내일 떠날 수 있게 가방 하나로 짐을 줄이는 게 좋아. 안 보는 전공서적, 한 달 동안 안 입은 옷. 다 갖다 버려야 돼” 졸업을 하고 홍콩으로 떠날 때 사장님이 했던 이야기다. 이 말이 각인되어 후로 짐을 꾸릴 때마다 상기했지만 아직도 짐이 한가득인 기분이다. 만화와 영화를 사랑해 독일에서 공부하며 맥주에 빠졌고 졸업 후엔 할리우드에서 특수분장일을 했던 진정한 키덜트. 아직도 만화와 장난감, 게임기에 진심인 사장님이다. 여러 이야기들을 나눴지만 특히 맥주에 대해 많이 배웠다. 덕분에 자격증도 따고.. 아무쪼록 배울 점이 참 많은 사람이다! 계획을 변경해 오늘 저녁 차로 바로 충주로 내려가는 탓에 많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새로 시작하는 가게 운영과 컨셉, 음식들에 대해서 많은 조언을 받고 떠났다. 비록 어떤 이유로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머지않아 다시 준비를 하게 될 때에 도움이 될 이야기들이다! 8월 중에 한 번 더 들려 채은이를 소개해줘야겠다.
아까 만났던 친구들과 생활맥주 사장님들에게 급하게 인사를 하고 터미널로 향했다. 그런데.. 킹시국 효과로 버스시간이 조정됐단다. 원래 충주로 가는 직통버스는 3대, 그중 저녁시간 버스가 취소됐다. 하루 더 머물고 가기엔 행색이 좋지 않아 충주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원주까지만 좀 데리러 오면 안 될까”
취업준비를 하는 녀석을 집까지 데릴러가고! 데려다주고! 이제 그 결실을 맺을 때가 됐다. 지금까지 기름값 다 퉁쳐줄 테니 큰 부탁 한번 하기로 했다. 덕분에 오늘은 집에서 편하게 잘 수 있게 됐다.
도움에 도움!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냉장고로 달려가 들여다본 채은이의 편지다. 출발하기 전 몰래 붙여놓고 갔던 글귀. 다시 읽어보니 그때와 마음이 다르다. 마지막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들어오기 전 비엔나 집에서 사색에 빠지며 깨달은 점이 있었다. 나는 목적을 갖고 돌아다닌 것이 아니다.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출발한 뒤 움직이다 보면 늘 새로운 문제에 봉착해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하다 보면 끝에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것이든 깨닫게 되었다. 결국 답은 길 위에 있었고 목표와 계획은 그 길에서 헤맬 때 나침반이 되어주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간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금을 헌신하고 있다지만 사실 조금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면 이미 그 순간에 올라와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시작했을 때, 즉 태어났을 때부터 우리는 과정 속에서 답을 점진적으로 알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는 하나의 명확한 ‘해답’을 알아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 답을 찾는 ‘해법’을 조금씩 알아내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