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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Sep 01. 2022

고장 난 연필깎이가 불러온 폭풍

내가 고쳐볼게!!!

저녁 8시쯤. 


아이는 사시 교정 치료를 위해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거실 소파에 앉아 동물의 왕국을 보는 시간이었고, 나는 그 틈을 타서 옆에 커다란 테이블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보통 이럴 때 와이프는 안방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데 할 일이 있었는지 내 옆의 자리에서 책을 펴고 연필깎이를 이용해 연필을 깎으려고 하고 있었다. 


우리 집 연필깎이는 3종류가 있다. 대형 연필깎이 2개와 중형 연필깎이 1개가 있다. 대형 연필깎이 중 하나는 내가 어렸을 적 많이 사용했던 국민 연필깎이 ‘하이 샤파 기차형 연필깎이’였고, 또 다른 하나는 점보 삼각 연필을 깎기 위한 ‘스테들러 마스 501 연필깎이’였다. 마지막으로 중형 연필깎이 1개는 아이 손에 딱 맞는 사이즈이며 하이 샤파 연필깎이와 같이 손잡이를 돌리며 연필을 깎는 연필깎이였다. 


와이프는 점보 연필이 아닌 보통 연필을 사용하기 위해 연필깎이를 찾았는데 마침 바로 옆에 스테들러 연필깎이가 있어서 이걸 이용해 연필을 깎을 려고 준비했다. 문제는 스테들러 연필깎이가 기차형 연필깎이 보다 세밀하게 조정할 수 있는 부품이 많아 조작이 어려웠고 와이프는 이것저것 조정하면서 연필을 깎을려다가 연필깎이의 손잡이 핸들이 ‘툭’ 분리시켜 버렸다. 갑작스러운 연필깎이의 고장에 당황한 표정의 아내와 무슨 일이 있느냐며 쳐다보는 아이와 나는 와이프가 만들어낸 의외의 상황에 가까이 다가갔다. ‘저게 저렇게 쉽게 고장 나는 건가?’를 생각하다 나는 곧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이내 멀어졌지만 아이는 아니었다. “내가 해볼래!!”를 외치며 만지작 거리며 와이프랑 투닥거린다. 


와이프: 아니~ 잠깐만 엄마가 이거 고쳐보려고 하고 있잖아~

아이: (자기가 먼저 하겠다는 듯이) 아니~ 내가 잠깐만 봐볼게~ (곧이어 흥분한 목소리로) 여기 이거~ 이 부품이 뒤로 가면 돼~!! 


와이프와 아이가 한참을 만지작 거리며 해보지만 연필깎이의 핸들은 쉽게 조립되지 않았다. 아이는 이내 흥미를 잊어버린 듯 다시 거실 소파에 앉아서 동물의 왕국을 보기 시작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와이프는 드디어 고치는 법을 알아냈다며 다시 연필깎이를 가지고 씨름을 시작했다. 그러나 방법은 알아도 고치는 것은 쉽지 않았기에 혼자 낑낑거리고 있길래 내가 가까이 다가가 고쳐보려고 시도하였다. 연필깎이를 요리조리 만져보는 아빠의 모습에 다시 연필깎이 고치는 것에 관심이 생긴 아이가 한참 집중하고 있는 내 무릎에 갑자기 앉으려고 시도하더니 연필깎이를 자신이 고쳐보겠다며 고장 난 연필깎이를 뺏으려고 했다. 


나: (갑작스러운 아이 등장에 답답해하며) 준형아 아빠 이거 하고 있잖아 잠깐만!! 잠깐만!!

아이: (자기도 해야겠다는 듯이) 내가! 내가 해볼래!!

나: (우겨대는 아이 모습에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아니! 아빠가 지금 이거 하고 있잖아!! 한참 하고 있는데 갑자기 끼어들면 아빠도 기분이 나빠!

아이: (목소리가 커진 아빠의 모습에 속상해하며) 아니 내 말 좀 들어봐!! 

나: 그래 그럼 준형이가 말해봐!!

아이: (갑자기 울먹거리며) 아빠가 다 고쳐버리면 나는 할 게 없잖아!!! 나도 하고 싶다고!! 아빠 미워!!


아이가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모습에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가 커졌더니 아이가 속상해하며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서로의 생각을 이해는 하지만 순간적인 감정을 둘 다 추스르지 못했다. 아이가 방에 들어가 버려 우리(아이와 나)는 강제적으로 잠시 감정을 식히게 되었다. 20분쯤 시간이 흘러 아이는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감정이 다 가라앉았는지 동물의 왕국이 끝나자마자 안방에서 얼굴을 빼꼼하게 내밀고 물어본다. 


아이: (방문으로 얼굴만 내밀고) 나 눈(안대) 떼도 돼?

나&와이프: 응~ 눈(안대) 떼도 돼~


대답을 듣고 나자 아이는 안대를 눈에서 떼어내고 쪼르르 와이프와 내가 앉아 있는 커다란 테이블 쪽으로 다가온다. 나는 와이프한테 가는 줄 알고 쳐다보고 있었고 와이프는 아이가 와서 안기는 줄 알고 팔을 벌렸다. 그런데 아이는 와이프의 품을 다람쥐처럼 쏙 빠져나가더니 테이블을 돌아서 나(아빠)한테 다가오길래 양팔을 벌려 안아주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나: (품에 아이를 안고) 준형아 아까 큰소리쳐서 미안~ 아빠가 큰소리 내서 놀랬지? 미안~

아이: (아빠를 꼭 안으며) 나도 갑자기 끼어들어 미안~

나: (조용히 다독이듯이) 응~ 우리 다음에는 그러지 말자


아이를 키우다 보니 갑작스러운 이벤트로 인해 감정의 소용돌이는 항상 예고 없이 찾아왔고 감정의 소용돌이가 폭풍처럼 휘몰아친 뒤에는 ‘왜 그랬을까’, ‘더 어른스럽게 대응하지 못했을까’라는 후회가 뒤따라 왔다. 그나마 아이가 8살이 되고 나서는 아이의 표현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고 아이도 아빠(나)와 엄마(와이프)의 표현을 이해하며 폭풍 같은 감정 대립 이후 서로를 다독일 수 있는 여유가 생겨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오늘 우리 집은 연필깎이로 폭풍이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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