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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Nov 07. 2022

느린 교육과 창조성


"선생님 혹시 000 학과 아세요?"


고3 담임이 되면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학생들 진로 학과 상담이라 생각한다. 상담 요청이 생길 때마다 학생이 말한 학과를 찾아보고 나서 놀란다. 비슷비슷한 학과가 너무 많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학과가 있고 그 학과별 차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내가 전공했던 생물만 하더라도 이제는 시스템생물학과, 생화학, 생명공학, 응용생물화학 등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무얼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할지 막막하다. 매년 학과에 조금씩 변동이 생기니 덩달아 매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담 요청 시 대부분 학생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학과에서 배우는 내용과 그 학과 졸업 후 진로에 관해 설명을 듣고 싶어 한다. 이쯤 되면 모든 대학 학과별 졸업생에게 요청하고 싶다. 무엇을 배웠고 어느 진로를 선택해서 가고 있는지 말이다. 고3 입시를 오랫동안 한 선생님이 대학교 홈페이지를 뒤져 보아도 쉽지 않으니 수험생이나 그의 부모님은 오죽 답답하겠는가.

답답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믿고 고등학교 3학년까지 쉼 없이 공부한 대학생에게 사회는 또 다른 능력을 요구한다.


"창조성(or 창의성)을 갖췄니?"


물론 고등학교까지 진학하고 배우는 와중에도 창의성에 대해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러나 등급과 점수가 중요한 고등학교 생활에 창의성을 갖추라는 말은 학생들에게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런 미래세대에 창의적 사고(創意的 思考) 또는 창조적 사고(創造的 思考)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사회의 요구에 따라 창조적 사고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로버트 루트번스타인(Robert Root-Bernstein)의 『생각의 탄생』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을까. 2007년 우리나라에 발행된 책은 그해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다.



13가지의 생각도구의 종점


『생각의 탄생』은 창조적 사고의 본질에 대해 고민한 작가가 창조적 사고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창조성이 뛰어난 천재적 인물들의 공통적인 발상법을 연구해 완성한 책이다. 천재적 인물들의 공통적인 발상법을 연구한 저자는 총 13가지의 생각 도구를 2장부터 각 장마다 하나씩 제시한다. 각 장에서는 독자가 생각 도구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실제 인물들이 생각 도구를 사용한 예시와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서술된다. 그리고 어떠한 노력을 통해서 생각 도구를 보다 더 잘 사용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설명하는 생각 도구는 관찰부터 시작하여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 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을 거쳐 통합에서 끝이 난다. 순서대로 제시되어 있지만 실제 사용되는 생각 도구는 순서가 없다. 관찰에 감정이입이 되기도 하고, 형상화가 모형 만들기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 말은 2장 관찰부터 14장 통합 내에서는 독자가 가장 마음에 끌리는 장을 먼저 읽어도 이야기의 흐름에 크게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책장을 펴 관심이 가는 장부터 읽어보기를 권한다.

공감각은 사물을 한 가지의 양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의 경험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열쇠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1인(2018), 생각의 탄생: 다빈치에서 파이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도구, 에코의 서재, p401>

책을 읽어보면 저자가 『생각의 탄생』을 통해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의 종점에는 통합이 있다. 하나의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공감각적 지각이 있을 때 진정한 이해에 다가갈 수 있으며 통합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지식의 전문화 시대를 건너 지식의 통합 시대를 미래세대가 이끌어야 하기에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통합이 가능한 미래세대 교육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교육의 목적은 ‘전인’을 길러내는 데 있어야 한다. 전인이야말로 축적된 인간의 경험을 한데 집약하여 ‘전인성 wholeness’을 통해 한 조각 광휘로 타오르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통합교육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오로지 그것 하나이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1인(2018), 생각의 탄생: 다빈치에서 파이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도구, 에코의 서재, p429>

유심히 관찰하기, 형상화를 통해 머릿속에 이미지 상상하기, 하나의 특성만 뽑아내는 추상화 등 외에 다른 생각 도구도 실제 실생활에 사용했기에 반가웠다. 이처럼 작가가 제시하는 생각 도구는 반가운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통합이 가능한 전인(全人)을 길러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와닿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사는 곳은 아직 세밀한 분야로 나누어진 전문가의 세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생각 Photo by Belinda Fewings on Unsplash >


『생각의 탄생』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보다 지식 구조 발달이 늘어나 새로운 문화 생활을 향유할 수 있고 건강하게 살아갈 기회가 생기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복잡해지고 있는 대학의 학과와 종합병원의 분과 발달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지금의 지식 발달은 곧 더 많은 분과 발달이다. 그러나 로버트 번스타인은 이를 거부한다.  

교육의 목적은 모든 학생들이 화가이자 과학자로서, 음악가이자 수학자로서, 무용수와 공학자로서 사고하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1인(2018), 생각의 탄생: 다빈치에서 파이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도구, 에코의 서재, p419>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말과 글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단어가 ‘빨리빨리’인 것처럼 현재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무엇보다 속도다. 누가 먼저 배웠는가? 대학은 누가 먼저 갔는가? 어떤 이는 우리나라 교육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 주입식 입시 교육이라는 표현이 교육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학생들이 빨리 배워 빨리 결과물을 내놓기를 추구하는 빠른 교육이 교육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빛을 연구한 아인슈타인이 놀라 넘어질 정도로 우리는 빠른 교육을 추구한다.  

빛 보다 빠른 교육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에게 로버트 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은 화가이자 과학자, 음악가이자 수학자, 무용수이며 공학자로서 사고할 수 있는 ‘전인(全人)’을 길러내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교육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닌 능동적인 배움과 창조의 과정에 초점을 맞춘 교육, 창조 과정에 필요한 직관적이고 상상적인 기술의 가르침, 한 가지 교육재료를 많은 과목에서 폭넓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 모든 과목에서 해당 개념들을 여러 형태로 발표하는 법의 가르침 등으로 모두 지금 우리 사회 시선으로 본다면 느린 교육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책을 통해 대상을 온몸으로 이해하고 문제를 정확하게 바라보며 생각 도구를 활용해 창조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느린 교육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젠가는 슬로 시티(Slow city)와 비슷하게 느린 교육(Slow education)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교육을 할지도 모르겠다. 빠름에 익숙해진 우리가 느린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이럴 때 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모습은 내 아이를 대하는 나의 모습이다. 조금이라도 아이의 모습이 느려지면 답답해하는 나의 모습은 느린 교육에 가까이 가기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정보의 양이 많아지고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고 세밀하게 나누어진 한 가지 전문 분야만 잘해도 된다는 생각은 이제는 틀린 생각이 되고 있다. 다양한 경험과 여러 가지 학제 간의 지식이 새로운 지식의 창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교육에 투자해서 재빨리 결실을 봐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교육은 자본주의의 논리로 해석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자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래를 위한다면 과하다 싶은 정도로 투자하고 다양한 경험을 장려하며 창조성이 피어나길 충분히 기다려주어야 한다. 빨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갇혀 기다려 줘야 하는 교육도 빠름을 강요하진 않았는지 아니면 흘려 지나치지 않았는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교수의 말처럼 교육은 미래세대의 지식 암기가 아닌 지식 창조를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생각 도구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고 창조성이 피어나길 기다려주는 것은 어떨까.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라도 세상 모든 것에 관심 있는 아들을 충분히 기다리지 못한 아빠의 ‘빨리빨리~’는 버려야겠다.





서지 정보


지은이: 로버트 루트번스타인(Robert Root-Bernstein)ㆍ미셸 루트번스타인(Michèle Root-Bernstein)

옮긴이: 박종성

제목: 생각의 탄생: 다빈치에서 파이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도구

판사항: 1판 2쇄

발행처: 에코의 서재

출간 연도: 2018년 10월 1일

페이지: 429면



Reference


교육부(2015), 교육부 고시 제2015-74호[별책1] 초ㆍ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

김현돈(2010), 느린 것이 아름답다! - 느림의 미학, 대동철학회, 제51집 pp.121-140

우리는 왜 창의성을 잃어버렸는가 1부.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https://youtu.be/iBlcNf0ZN5w]

우리는 왜 창의성을 잃어버렸는가 2부.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https://youtu.be/nOgorDs9huQ]

정준호(2016), 전문가는 누구인가, 누가 전문가인가, 사이언스 온[http://scienceon.hani.co.kr/374846]

통계청(2022), 장래인구추계 중 학령인구 [https://kosis.kr/visual/populationKorea/PopulationByNumber/PopulationByNumberMain.do?mb=N&menuId=M_1_4&themaId=D04]

황진미(2022), ‘자본주의학교’ 유익한 경제교육 예능? 세습 자본주의 민낯,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KBS2 <자본주의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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