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도시를 읽는 법과 규범 구조

2부. 도시를 규정하는 언어, 제도와 법의 구조 - 2.1 프롤로그

by Jeonghoon KIM
PB020788-1compression.jpg 툴루즈의 라 메종 유니베르셀 (La Maison Universelle) - 석조 질감 사이로 현대적 유리 파사드가 스며들어 입면에 리듬감을 만든다.


도시는 언제나 규범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 규범은 단순히 벽의 두께나 창의 위치를 정하는 기술적 지침에 그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도시가 무엇을 지키고,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담겨 있으며, 프랑스의 도시계획은 이를 오랜 시간 언어로 번역해 왔다.

즉, 도시의 형태는 법과 제도가 쓰는 문장이고, 그 문장은 시대의 사유와 감각을 담는다.

파리의 가로, 툴루즈의 광장, 리옹의 언덕 위 주거지까지 —
이 모든 공간은 무작위로 세워진 건물이 아니라, 법률과 계획, 제도의 층위가 서로 맞물려 만들어낸 텍스트다.
그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조항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허용하며, 어떤 미래를 상상하는지를 해독하는 과정이다.

프랑스의 거리를 걷다 보면, 시간의 층이 켜켜이 쌓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19세기 석조 건물의 질감 사이로 현대 유리 파사드가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도시는 마치 오래된 문장 사이에 새 문장이 덧붙여진 한 권의 책처럼 읽힌다.
프랑스의 도시는 언제나 보존과 생성이라는 두 문법 사이에서 자신을 써 내려간다.


PB020787.JPG 툴루즈 시내의 샤를 드 골 광장 (Square Charles de Gaulle) - 도시의 규범은 거리의 리듬으로 드러난다.


도심 대부분이 문화재 보호구역인 동시에 새로운 사회적 기능과 개발 수요가 존재한다.

그러나 과거를 무너뜨릴 수도, 현재를 멈춰 세울 수도 없다.

그래서 프랑스의 도시계획은 단순한 미적 감상이나 속도 경쟁이 아니라, 시간의 층위를 설계하는 활동으로 이해된다. 건축과 도시는 물리적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간의 구조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 균형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가 바로 법과 제도다.
도시계획법(Code de l’urbanisme), 건축 및 주거법(Code de la construction et de l’habitation), 환경법(Code de l’environnement), 문화재 보호법(Code du patrimoine) 등은 서로 다른 영역의 규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문맥 안에서 읽혀야 하는 도시 문법의 다양한 어휘다.
그들은 도시의 형태를 단순히 명령하지 않고, 상충하는 가치들을 조율하며 도시의 지속가능성, 공공성, 역사적 연속성을 만들어낸다.


이 제도적 언어는 단계적 구조를 갖는다.
국토정합계획(SCOT)은 도시와 지역의 방향성을 그리는 서문에 가깝고,
지속 가능한 정비·개발 계획(PADD)은 그 철학을 구체화한 장이다.
지역 도시계획(PLU)은 일상의 문장처럼 건축 허가와 토지 이용을 규정하며,
최근의 순 토지 인공화 제로(ZAN) 원칙은 도시가 남기는 생태적 발자국을 최소화하자는 윤리적 부록과 같다.
모든 규범은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는 문체이자, 인간과 환경, 역사와 미래가 함께 읽히는 리듬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도시들은 전쟁, 급격한 산업화, 재개발 등으로 과거의 흔적이 쉽게 지워지곤 한다.

규범과 제도가 충분히 작동하지 않은 환경에서는, 도시의 기억과 시간적 층위가 일부 소실될 수 있으며, 변화가 주로 물리적 재구성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반면, 프랑스는 제도와 규범을 통해 변화 속에서도 시간의 층위를 남기고, 역사와 현재가 최대한 공존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변화의 속도를 늦추면서도, 그 변화가 켜켜이 쌓이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도시의 지속가능성은 그렇게, 멈춤과 생성이 교차하는 시간의 편집 기술로 완성된다.


IMG_2493.JPG 과거 골목의 틀을 유지하며, 현대적 건축언어로 덧입혀진 인사동


이 장은 바로 그 편집의 기술을 읽는 시도다.
도시계획의 법령과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며, 그 언어가 어떤 논리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프랑스의 경험이, 빠른 개발을 추구하는 도시들에게 시간을 다시 읽고, 규범 속에서 균형을 설계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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