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앞에서 다시 시작하는 법

05. 스무 해가 지나 다시 꿈속에서 마주한 불안과 가능성

by Jeonghoon KIM

어떤 밤, 나는 끝났다고 믿었던 장면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간다.
그곳은 낡은 고등학교 교실이었다.
창문 틈으로 겨울빛이 스며들고, 공기 중에는 낯익은 먼지 냄새가 희미하게 떠다닌다.
책상 위 공책은 한 장도 채워지지 않은 백지로 남아 있다.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그때의 내 모습이 고등학생 때의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선생님이 말했다.

“한 과목을 패스하지 못했어. 넌 다시 수업을 듣고 시험을 쳐야 돼.”


그 말에 심장이 미묘하게 떨린다.

이미 스무 해 전, 나는 프랑스로 떠나 건축학교를 졸업했고, 삶의 골조를 쌓아왔다.
하지만 꿈속에서는 시간의 층이 뒤엉켜, 나는 여전히 백지 앞에 서 있는 학생이었다.


어느 날, 그 교실은 대학 설계실로 변해 있었다.
익숙한 스튜디오의 공기가 스며들고, 책상 위에는 완전히 빈 도면이 펼쳐져 있다.
붉은 펜도, 코멘트도, 한 줄의 계획도 없다.
공간은 차갑게 조용하고, 흰빛과 그림자만이 어딘가를 비춘다.


창에서 들어오는 빛줄기는 내 앞의 백지 위로 길게 드리워지고,
시작하지 않은 시간의 긴장을 고조시킨다.
마음 한편에는 이상하게도, 지금 이 백지를 채우지 못하면
내가 이루어 온 모든 것이 사라질 것만 같은 불안함이 스며 있다.


고개를 돌리면 연필과 스케일, 삼각자가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옆 친구들이 조심스럽게 모형을 만드는 소리,
벽을 타고 울리는 작은 수군거림,
모든 감각이 살아 있는 공간 속에서
나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나를 마주한다.


발밑의 콘크리트가 긴장을 스며들게 하고,

목재 제도판의 따스한 결이 손끝을 감싸며,
플라스틱 자의 매끈함과 연필심이 종이를 스치는 감촉까지
모두 내 안의 떨림과 맞닿아 있다.


존재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말한다.
“여기서부터 네가 만들어야 한다.”


나는 깨닫는다.
꿈속의 공포와 떨림은 실패가 아니라 가능성임을.
처음 건축을 사랑하던 마음,
새로운 공간과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던 설렘,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던 무언가—
모두 이 백지 앞의 긴장 속에서 살아 숨 쉰다.


빛이 도면 위에서 부드럽게 흐르듯,
내 마음속 기억과 가능성이 겹겹이 쌓이며,
공간과 시간이 하나로 얽힌다.


잠에서 깨어 창문 너머로 프랑스의 아침 공기가 들어오면,
꿈속의 교실과 스튜디오는 사라진다.
하지만 긴장 속에 흘렸던 땀 내음과 정리되지 않은 이불,
아이와 아내가 있는 집,
그리고 백지와 공간이 남긴 여운은
내 마음 깊숙이 남아
“아직 완전히 시작되지 않은 너의 길”을 속삭인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그 불안감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닌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이곳, 스무 해의 삶 위에,
아직 그려지지 않은 마음과 가능성을 하나씩 올려놓으며,
백지 앞에서 나는 다시 시작한다.

빛과 재료, 공간과 시간 속에서,
나의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2막을 조심스레 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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