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프랑스 도시

1.5 문화유산과 경관 관리로 본 도시 설계

by Jeonghoon KIM

1부. 규범의 층위를 걷다 - 3. 규범이 만든 도시의 질서와 아름다움

로지에 정원 (Jardin des Rosiers)에 남아 있는 중세 성벽 잔재 (사진 출처: © Mbzt, via Wikimedia Commons, CC BY 3.0)
로지에 가(Rue des Risiers)에서 정원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돌담


로지에 가(Rue des Risiers)를 따라 정원으로 들어서면, 중세 성벽의 잔재가 남아 있는 돌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돌담을 지나 아이들이 뛰노는 현대적으로 구성된 잔디밭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겹쳐 있는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 마레 지구에 위치한 이곳은 Hôtel de Coulanges를 포함한 역사적 건물들과,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조성된 조제프 미그네레트 정원(Jardin des Rosiers – Joseph Migneret)이 함께 어우러진 예다. 성곽 탑과 돌담 등 역사적 구조물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산책로, 잔디밭, 어린이 놀이터와 다양한 식재가 결합되어, 도시 속 과거와 현재의 조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공간은 이후 논의할 프랑스 건축유산 보호 정책과 제도적 맥락을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프랑스는 유럽 내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건축유산 보호 정책을 운영하는 국가 중 하나이다. 그 중심에는 1913년에 제정된 역사기념물법 (Loi sur les monuments historiques)이 있으며, 이는 단지 개별 건축물의 물리적 보존을 넘어서, 그 건축물이 놓인 도시적 맥락 전체를 보호 범위에 포함시키는 점에서 독특하다. 거리의 시선 축, 주변 경관, 인접 건물과의 조화까지도 법적 고려 대상이 되며 [1], 이는 도시를 하나의 연속된 문화 텍스트로 인식하는 프랑스의 유산 관리 철학을 잘 보여준다. 초기에는 단순히 고건축의 보존을 목표로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 전체의 경관과 기억을 아우르는 방식으로 제도가 발전했다.


특히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 반경 500미터 이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건축 행위는 ‘프랑스 건축유산 담당 건축사(Architecte des Bâtiments de France, ABF)’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이 제도는 단순한 행정 절차를 넘어, 도시 경관과 문화적 상징성에 대한 실질적 통제력을 갖는 구조다. [2] ABF는 국가가 임명하는 고위 공공건축가로, 허가 여부를 판단할 때 단지 기술적 요건만을 보지 않는다. 역사성과 장소성, 경관의 연속성 등 비가시적인 가치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을 내린다.


ABF가 관련된 허가신청 시 행정절차 도식화


이러한 심의는 법적 구속력뿐 아니라, 도시의 시간성과 사회적 의미를 고려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동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심의가 다소 유연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설계안이 주변 건축 양식과 확연히 다르더라도, 도시 전체 맥락 속에서 균형 있는 시각적 긴장을 만들어낸다면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과거를 고정된 형태로 보존하기보다, 현재의 건축 언어로 재해석하고 변주하는 방식으로 문화유산을 보호한다. 이를 통해 도시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와 현재가 맞물린 문화적 구조물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제도가 언제나 순조롭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ABF의 판단 기준이 상당 부분 주관적이어서, 건축가와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한다. 현대 건축의 실험적 형태나 과감한 제안은 때로 경관 훼손이라는 이유로 승인받지 못하며, 이로 인해 프랑스 도시에서는 새로운 건축 언어의 등장이 제한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를 존중하면서도 도시가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는 균형의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유산 보호와 경관 관리 제도는 도시 공간을 단순한 기능의 집합이 아니라, 시간성과 기억, 정체성이 켜켜이 쌓인 하나의 문화적 구조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는 도시를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공존하는 공간으로 사유하게 하며, 건축이라는 실천이 단지 조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선택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결국, 프랑스의 경험은 우리에게 도시와 건축을 대하는 방식이 과거의 기록을 읽는 동시에, 현재를 설계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행위임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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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oi du 31 décembre 1913 sur les monuments historiques


[2] Ministère de la Culture, Rôle de l’ ABF dans les procédures d’urbanisme,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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