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변훈련에 대한 현실적 고찰
우리 딸, 채연이가 만 30개월을 지났을 무렵,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변기에 앉아 쉬하는 건 제법 능숙해진 채연이가 변기에 응가하는 건 유독 완강히 거부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똥 관련 콘텐츠를 스스로 찾아보기도 하는 걸 보면, 배변에 대해 영 관심이 없진 않은 것 같았다. 한데 막상 시도해보자고 하면, 녀석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채연이가 변기에 앉아 쉬하고 있을 때 ‘끙하고 응가도 해보자!’라며 힘주는 시범을 보여줘도, 장난처럼 ‘끙!’하며 따라 하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말은 다 큰 애처럼 잘하면서, 기저귀를 아직 못 떼네!”
우리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처럼 던지신 저 한마디는 내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거기다 어린이집 같은 반 아이가 기저귀를 먼저 뗐다는 소릴 들으니, 알량한 경쟁심까지 발동했다.
다른 그 무엇보다 내 머릿속에 든 배변훈련에 관한 지식이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다.
의대생 시절부터 ‘소아과의 바이블’로 열독해왔고,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된 지금도 항상 내 진료실 책상 반경 1m 이내에 모셔두고 있는 「홍창의 소아과학」에는 ‘대소변 가리기’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
신경계가 성숙함에 따라 어린이는 대소변을 수의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된다.
대부분의 소아에서 18개월에서 2세 사이에 대소변 가리기 연습을 시작할 수 있다. 대변 가리기(bowel control)는 29개월(16~48개월 범위), 소변 가리기(bladder control)는 32개월경(18~60개월 범위)에 가능하게 되어 대변 가리기를 소변 가리기보다 먼저 할 수 있게 된다.
대소변을 가릴 수 있게 되는 시기는 개인 차이가 많고 가족적으로도 차이가 많아 꼭 어느 시기까지 완전히 가려야 한다고 정할 수는 없으나 생후 3년 말까지 대변을 가리고, 여아는 5년, 남아는 6년까지 밤에 소변을 가릴 수 있는 것으로 기준을 잡는다. (홍창의 소아과학)
소아과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엔 저 파트를 통째로 달달 외우기도 했었고, 전문의가 된 후에도 배변훈련과 관련한 육아 상담은 저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었다. 의사가 된 이래로 교과서적인 진료를 추구하고자 노력해왔던 나로선 육아 상담 역시 교과서에 충실한 게 당연했다.
나는 교과서에 나온 대로 18개월부터 배변훈련을 시작해야 한다고 아내를 닦달했고, 어린이집 선생님에게도 공조를 요청할 것을 종용했다.
조바심 내는 나를 영 마뜩잖아하던 아내는 그래도 명색이 전문가인 내 의견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었던지 처제 네로부터 물려받은 유아용 변좌 커버와 계단형 발 받침대를 창고에서 꺼내와 안방 화장실 변기에 세팅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우리는 바로 본격적인 배변훈련을 시작했다.
다행히 채연이는 변기에 앉는 데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채연이는 아침에 일어난 직후와 저녁에 자기 전에 꼭 변기에 앉아 쉬할 정도로 놀라운 발전을 보였고, 며칠 안 가 밤에 자는 동안엔 거의 기저귀를 적시지 않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어린이집에서도 같은 반 다섯 명의 아이 중 채연이 혼자서만 변기에 앉아 쉬한다는 얘길 듣고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 정도의 페이스라면 금방이라도 기저귀를 뗄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예감은 순전히 착각에 불과했다.
변기에 쉬는 곧잘 하는 채연이가, 응가는 꼭 기저귀에만 하려고 했다.
그나마 소변도 내가 악착같이 데려다 변기에 앉히는 아침·저녁을 제외하곤 기저귀에다 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급기야 어느 순간부터는 어린이집에서 변기에 쉬하는 걸 도로 거부하게 되었다는 비보에, 나는 그만 맥이 탁 풀리면서 깊은 혼돈에 빠지고 만다.
‘왜 교과서와 다른 거지?’
내가 절대적으로 숭배해온 「홍창의 소아과학」에선 분명 대변 가리기를 소변 가리기보다 먼저 하게 된다고 되어있었건만….
「홍창의 소아과학」에는 대변 가리기가 가능해지는 평균 연령이 29개월로 나와 있는데, 채연이는 왜 30개월이 넘도록 똥을 못 가리는 걸까?
물론 책에는 분명 16개월부터 48개월 범위까지 개인차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부모 마음이란 게 어디 그런가? 우리 아이가 평균 월령보다는 더 빨리 대변 가리기가 가능해졌으면 하고 바라기 마련.
게다가 교과서대로라면, 무려 16개월에 똥을 가리는 아이도 있다는 말 아닌가?
“어린이집 선생님 말씀이, 채연이가 배변훈련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좀 받는 것 같대. 조금만 느긋하게 기다려주자고 하시네.”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너무 성급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일단 조금 물러서서 기다려보기로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아빠, 똥! 똥!”
저녁 식사 후에 자기 방에서 혼자 놀던 채연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날 부르며 달려 나왔다. 놀라움보다 반가움이 더 컸던 나는 채연이를 번쩍 안아 들고는 안방 화장실로 냅다 뛰었다. 그리고는 유아용 변좌 커버와 발 받침대를 얼른 세팅한 후, 채연이를 변좌에 앉혔다.
“끙하고 힘을 줘 봐, 채연아!”
“아빠, 너무 아파! 똥이 안 나와!”
“조금만 힘을 더 줘 봐! 그럼 나올 거야!”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채연이의 항문으로부터 굵은 똥 덩어리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채연아, 축하해! 우리 딸 정말 잘했어!”
오랜 기다림 끝에 성공한 채연이의 첫 응가를 보고 잔뜩 흥분한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채연이의 이마와 볼에 뽀뽀 세례를 연거푸 퍼붓던 나는 이내 스마트폰을 가져와 똥 인증샷을 찍어 친가·외가 가족 단톡방에 올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채연이는 아빠·엄마의 호들갑에 응수하면서도 어딘가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자기 몸에서 나온 커다란 똥 덩어리가 신기한지 물끄러미 변기 안을 들여다보던 채연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랬다.
“그런데 너무 아팠어!”
그렇게 말하는 채연이의 표정을 보니, 진짜로 많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똥 굵기를 보니 정말 아플 만도 했다.
그러니까 채연이는, 기저귀에다 응가를 시도하던 중에 굵은 똥이 항문에 걸려서 잘 나오지 않자 나를 찾으며 달려온 것이었다.
그날의 첫 응가가 호들갑 떨며 기뻐할 일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다음 날에야 깨닫게 된 나였다.
“변기에 응가하는 건 너무 아팠어!”
변기에 똥을 누는 건 아픈 거라는 그릇된 인식이 채연이의 머릿속에 탁 박혀버린 것이었다.
“아니야, 채연아! 어제는 똥이 너무 굵어서 아팠던 거고, 기저귀에 하는 것보다 변기에 하는 게 훨씬 안 아파!”
어떤 말로 해명을 해봐도, 채연이의 의식에 한 번 깊이 박혀버린 관념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은 다시 채연이의 변기 거부가 이어졌다.
우리는 또다시 한 걸음 후퇴한 채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애써 마음을 비운 채로 지내던 어느 날, 나는 근무 중에 아내의 카톡 메시지를 받는다. 채연이가 다시 응가에 성공했다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변기 거부가 다시 시작된 지 약 2주 만에 이룬 쾌거였다.
“어떻게 다시 변기에서 응가를 시도하게 된 거야?”
그날 저녁 퇴근 후, 비결을 묻는 내 질문에 대한 아내의 대답은 이랬다.
“어제 기저귀에 응가했을 때 말이야, 팬티형 기저귀를 원래대로 찢어서 벗기지 않고 일부러 밑으로 내려서 벗겼어. 그렇게 해서 변이 다리에도 묻고 화장실 바닥에도 묻게 했지.”
말하자면 아내는 의도적으로 채연이에게 기저귀에 응가하는 것에 대한 불편한 기억을 심어주려 했던 거다. 깔끔한 성격의 채연이는 자신의 다리에 변이 덕지덕지 묻는 것을 불쾌한 경험으로 받아들였을 테니 말이다.
그랬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그다음 날엔 순순히 변기에 앉아 응가를 시도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1차 시도에선 실패했다가, 좀 이따 다시 변기에 앉힌 후에 슬쩍 자리를 피해 줬더니 스스로 집중해서 응가하는 데 성공해냈다고 했다.
“역시 엄마는 다르네!”
나는 패배를 승복하고 아내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성향과 기질을 명민하게 파악한 엄마의 육감이, 헛똑똑이 아빠의 교과서적 지식보다 훨씬 더 주효했음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까?
그렇게 해서, 채연이는 다행히 만 3세 반으로 진급하기 전에 기저귀를 떼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말이다.
내 딴에는 배변훈련이랍시고 감행했던 시도들이 과연 채연이의 대소변 가리기에 도움이 된 건지, 아니면 오히려 더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는지, 나는 좀 헷갈렸다.
차라리 내가 좀 더 참고 기다려줬더라면, 더 순조롭게 대소변 가리기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 소아과 근처에 있는 S 아동복지시설에서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아이들을 돌봐오신 원장 수녀님은 일부러 배변훈련을 따로 시키지 않는다고 하신다. 따로 훈련이란 걸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스스로 할 줄 알게 된다고….
(물론 그곳은 여러 아이가 함께 생활하는 환경이라 서로 보고 배우는 모방 학습 효과가 매우 크긴 할 것이다.)
우리 딸로부터 얻은 경험이나 주변의 여러 사례를 종합해 봐도 배변훈련이라는 게 정말 필요한 것인지, 또 그것이 아이의 대소변 가리기에 정말 도움되는 건지, 갈수록 의문이 든다.
다음에 첨부한 짤은, 내가 한창 채연이의 배변훈련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시기에 보게 된 한 ‘배변훈련 관련 포스팅( http://naver.me/FJ2KMaqA )’에 달린 댓글을 캡처한 것이다.
아빠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배변훈련은 18개월 무렵부터 해야 합니다!’라고 보호자들에게 주장해왔던 사람인이었지만, 막상 보호자의 입장이 되고 보니 이런 댓글들에 더 깊이 감정이입되어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바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배변훈련이 전혀 필요 없다고 주장할 의향은 없다.
‘훈련’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변기에 앉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애줄 필요는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오래도록 변기에 앉아 똥 누는 걸 거부할 경우에는 아이가 부모의 눈을 피해 숨어서 변을 보거나 의도적으로 오래 변을 참아서 만성 변비가 발생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의 개입은 적정한 선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기간에 대소변 가리기를 성공시켜 기저귀를 빨리 떼려는 욕심은 반드시 경계해야만 한다.
변기에 앉아 대변을 보는 것이 번거롭고 굴욕적인 행위가 아니라 훨씬 더 편하고 즐거운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는 정도는 우리 부모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변기에 앉아있을 때 신나는 노래를 불러준다거나 좋아하는 캐릭터 인형을 변기 위에 앉혀 응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따위….
반대로 기저귀에 대해서는 불편하고 불쾌한 기억을 만들어주는 것도 시도해봄 직하다. 우리 딸의 경우에는 실제로 이 방법이 통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떤 방법이든 우리 아이의 성향과 기질을 반영한 맞춤형 솔루션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을 자조 섞인 목소리로 피력해본다.
아이마다 특성이 모두 다른 만큼 육아에는 정답이란 게 없듯이, 대소변 가리기를 잘하는 방법도 아이마다 가정마다 다 다를 것이다.
그래도 굳이 하나의 모범답안을 뽑자면, 그건 바로 칭찬일 것이다.
그리고 잘했을 때는 칭찬을 해주되 실수했을 때 절대로 야단을 치면 안 된다는 점이 바로, 인간 아이와 강아지의 차이점이 아닐까 싶다.
‘아이의 사소한 시도에도 아주 크고 명확한 리액션으로 칭찬해주기!’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위의 당부만은 꼭 강조하고 싶다.
긍정의 마법은 대소변 가리기에서도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추가 팁 하나!
이건 처제인 지유엄마로부터 전수받은 노하우인데, 꽤 유용한 정보인 것 같아 공유한다.
처음에 유아용 변기에서 배변 연습을 하면, 나중에 어른용 변기로 옮겨갈 때 또 한 번의 적응과정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처음부터 어른용 변기에 유아용 변좌 커버를 설치한 후에 배변을 시도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더 나을 수 있다.
물론 어른용 변기 사용을 어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아이의 경우엔 유아용 변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무방할 테지만 말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290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