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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재혁 Apr 03. 2020

어머니는 드레스가 싫다고 하셨어

부모님의 금혼식을 기념해 가족사진을 찍다

2019년 11월 21일은 부모님의 결혼 50주년 기념일이었다.

그 당시에 책 원고 집필에 여념이 없었던 나는 날짜를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축하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채 하루를 흘려보내고 말았다.


저녁 아홉 시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가족 단체톡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올리셨다.

오늘 우리 결혼 50주년. 신세계 함바그 집에서 둘이 식사했다. 지영이(큰누나) 열심히 일하고, 지은이(작은누나) 서연이(조카) 잘 키우고, 재혁이네 채연이 잘 키우며 의사로 작가로 열심히 사는 것 최고의 보람으로 여기며, 엄마가 너희들 잘 키운 것 무엇보다 고맙게 생각한다

이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그토록 특별한 날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아들로선 너무나도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을 살아내기도 빡빡한 어른이 된 후로부턴 부모님의 결혼기념일까지 매년 살뜰히 챙겨 온 건 아니었지만, '50주년'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가만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카톡 채팅방에 (결혼 안 한) 큰누나, 작은 누나 부부, 그리고 집사람을 초대해 긴급회의를 열었다. 사실, 회의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다. 우리 부부가 모종의 프로젝트를 추진할 테니 무조건 잘 따라와 달라는 부탁을, 누나들과 자형은 흔쾌히 받아주었다.




나와 집사람이 추진하려는 플랜은 다름 아닌 가족사진 촬영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결혼 50주년을 기념한 촬영인 만큼, 조금은 특별한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가족 구성원이 드레스와 턱시도를 갖춰 입은 채 리마인드 웨딩 형식으로 촬영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계획은 뜻밖의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사진의 주인공이 되셔야 할 어머니가 극구 반대를 하셨기 때문이다.

“뭣하러 쓸 데 없는 겉치레에 돈을 쓰냐? 그냥 가지고 있는 옷 잘 차려입고 찍으면 되지... 그리고 아직 웨딩드레스도 안 입어본 너희 큰누나한테 드레스 입히는 것도 맘에 걸려.”


어머니가 반대 이유 중 하나로 거론하신 큰누나 또한 난색을 표했다. 꼭 미혼이어서가 아니라, 사춘기가 지난 후론 늘 바지만을 고수해왔던 큰누나에게 드레스는 스스로 용납이 안 되는 의상이었던 것이다.


우리 부부의 오랜 설득 끝에 간신히 어머니의 마음을 돌렸고, 큰누나는 본인의 검은색 바지 정장을 입는 것으로 합의한 후에야 촬영 일정을 확정 지을 수 있었다.




대망의 촬영일이었던 설 다음날, 명절을 치른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우리에겐 꼭두새벽처럼 느껴진 아침 8시부터 촬영 준비가 시작되었다.

아홉 명이나 되는 인원이 돌아가면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다 보니, 촬영 전 몸 단장에만 3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시작된 촬영.


아홉 사람의 포즈와 표정을 하나하나 세팅해가며 촬영하다 보니, 다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게 어찌나 힘들던지... 안면 근육에선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고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으며 다리와 발바닥은 저리다 못해 무감각해졌다. 난생처음 하이힐을 신은 채 고난이도의 포즈를 유지하느라 너무 힘들고 아팠던 조카 서연이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침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90분이 넘는 촬영을 소화해야 했던 우리 가족은 완전 기진맥진해진 상태로 근처 국숫집으로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가족들의 고단한 표정을 마주하자니, 내가 괜한 일을 벌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완성된 결과물을 보니, 그날의 고생에 대한 기억은  씻은 듯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어엿하게 서 있는 가족들의 모습에선 힘든 내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굴 만나도 꺼내 보이며 자랑하고 싶은, 단란하고 행복한 우리 가족의 모습이 고해상도의 픽셀 위에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하이힐 신은 발이 아파서 울기까지 했던 조카 서연이는 가장 찬란한 미모로 사진을 빛내주었다.

무엇보다 어린 채연이가 오랜 촬영 시간을 잘 견딜 수 있을지 걱정했었는데, 가장 조용하고 의젓하게 촬영에 임한 사람이 바로 채연이었다. 아무래도 채연이는 연예인 기질을 타고난 모양이다.

헤어와 메이크업을 담당해주신 분의 조언을 받아들여 준비해 간 바지 정장이 아닌 드레스를 입고 촬영에 임한 큰누나 역시, 마치 늘 드레스를 입고 지내왔던 사람처럼 멋지게 촬영을 소화했다.


뭐니 뭐니 해도, 그날의 포토제닉은 단연 어머니였다. 힘들어하는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시종일관 의연하고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신 어머니는 사진작가님으로부터 칭찬까지 받은 바 있다. “쓸 데 없이 무슨 드레스?”냐며 펄쩍 뛰시던 그때 그분은 대체 어디 가신 건지...


어머니의 아들로 지낸 지 어언 45년째인데, 여전히 어머니의 화법은 곧잘 우릴 헷갈리게 만들곤 한다.

이를 테면,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나는 안 먹어도 괜찮다!’, ‘괜히 애쓸 거 없다!’와 같은 그런 워딩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선, 엄마 말을 무조건 잘 듣는 자식보다 때론 당신의 말씀에 반하여서라도 할 건 해드리는 쪽이 더 현명한 자식이 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다른 건 몰라도, 드레스가 싫다고 하셨던 그 말씀만은 거역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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