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를 즐겨 치시는 분들은 아마 “겜뻬이”라는 말을 많이 듣기도 하고 또 자주 사용하기도 할 것이다. 보통 당구는 1:1로 하는 게임이지만, 친구들끼리 복식으로도 많이 즐긴다. 편을 먹고 하는 당구 게임, 즉, 복식 당구 게임을 당구애호가들은 보통 겜뻬이라 한다. 그런데 이 “겜뻬이”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12세기 말까지 일본의 권력은 귀족들이 독차지하였다. 이들은 권력과 부를 독차지하고,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하여 무사들을 고용하였다. 철저한 귀족사회로서 무사들은 “귀족의 개”라 할 정도로 천대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사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난을 일으켰는데, 여기에 강력한 두 무사 가문이 등장한다. 바로 원 씨(源氏, 겐지)와 평가(平家, 헤이케)라는 두 가문이다. 원(源) 씨 가문은 “미나모토”, 평(平) 씨 가문은 “타이라”라고 발음한다. 원 씨 가문(겐지)과 평 씨 가문(헤이케), 두 무사 가문을 합쳐서 “겜뻬이”(源平)라 한다.
두 가문은 무력을 동원하여 천황가와 귀족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두 가문 간에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 이 두 가문 간의 전쟁을 “겜뻬이 합전”(源平合戦)이라 한다. 이 전쟁에서는 일본의 모든 무사 세력들이 두 가문 어느 쪽엔가 가담하여 권력을 향한 전쟁을 벌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여러 세력이 서로 편을 갈라 싸우는 싸움을 “겜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굳이 우리말로 하자면 “청백전”(靑白戰) 정도로 부르면 될 것이다. 겜뻬이 전쟁에서 겐지(源氏) 측은 백기(白旗), 즉 흰색 깃발, 헤이케(平家)는 홍기(紅旗), 즉 붉은 깃발을 들었다.
겜뻬이의 합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긴 역사 가운데 역사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시기나 사건이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많은 이야기나 드라마의 소재가 되고 있고 그 시대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예를 보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시기라면 삼국통일을 전후한 수 십 년간, 조선 건국에서 세종대왕에 이르기까지의 수 십 년간, 그리고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대, 구한말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대부분의 역사드라마나 소설, 영화 등이 이 시기를 무대로 하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하이라이트가 되는 시대가 언제일까? 시대 순으로 이야기한다면 제일 먼저가 겜뻬이 합전을 둘러싼 시기, 그다음이 오나 노부가나(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활약하던 전국시대에서 세키가하라(関が原) 전투에 이르는 몇십 년 간, 그리고 에도(江戸) 막부(幕府)가 몰락하게 되는 19세기 후반의 몇십 년 간 정도가 될 것이다.
겜뻬이 전쟁은 정말 소설보다도 더 흥미 있는 역사이다. 권력투쟁이라는 전형적인 정치적ㆍ군사적 갈등과 함께 이 전쟁의 두 주인공이 되는 겐지(源氏)와 헤이케(平家) 두 가문 간의 얽히고설킨 갈등, 두 가문에 주요 인물 간의 사랑과 질투, 원한과 복수 등 드라마가 갖추어야 될 온갖 소재들을 드라마 이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현실에서 어떻게 이렇게 꼬이고 꼬인 인간관계와 갈등이 나타날 수 있을지 정말 신기할 정도이다.
드라마 <요시쯔네>(義經)와 <타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그 시대적 배경이 되는 일본 역사를 조금 알아보자.
1990년대 KBS에서 <삼국기>란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는데, 신라의 삼국통일 직전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각축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에서는 백제와 고구려에도 신라의 화랑과 비슷한 조직이 있었다고 나오는데, 백제의 젊은이들을 수련시키는 조직에 왜국(倭國)에서 <카마다리>(鎌足)라는 청년이 유학을 온다. 카마다리는 실존 인물이지만, 백제에 유학을 온 것은 어디까지나 픽션이고 실제 역사에서는 그런 일은 없었다.
이 카마다리가 일본에서 7세기 후반에 있었던 천황가의 친위쿠데타였던 대화개신(大化改新)에 절대적 공을 세우고, 일본 조정에 등장한다. 이후 <카마다리>의 후손인 후지와라(藤原) 가문은 500년 동안 일본의 권력을 독점한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 걸쳐 일본은 후지와라 가문들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나라였다. 귀족들은 일본 전국의 땅을 각자 차지하여 자신들의 영지로 하여 장원을 만들었다.
귀족들이 영지에서 가렴주구로 백성들을 수탈함에 따라 백성들은 굶어 죽기도 하고 도망을 가서 도둑이 되기도 하였다 귀족들에 대항하는 도적들이 전국 도처에서 날뛰어 귀족들의 영지를 위협하였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귀족들은 무사들을 고용하여 영지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러 무사 가문들이 생겨났는데, 그중에서도 미나모토 가문(源氏, 겐지)과 타이라 가문(平家)이 가장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이 두 가문이 무사들 가운데는 두각을 나타내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신분은 보잘 것 없었다. 귀족들에게 무시당하고, 천대받았다.
미나모토 가문과 타이라 가문의 경쟁
여기서 울분을 느낀 무사들이 미나모토 가문과 타이라 가문을 중심으로 귀족과 천황 권력에 반기를 들고일어났다. 두 가문은 서로 손을 잡고, 귀족들을 쳐부수고 그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왔다. 무사들이 일단 권력을 잡자, 무사 계급을 이끌던 미나모토 가문과 타이라 가문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일어나, 이 싸움에서 타이라 가문이 승리한다. 타이라 가문은 모든 권력과 부를 독점한다. 그리고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미나모토 가문을 철저히 응징하여, 미나모토 가문의 주요 인물들은 물론 그 자식들까지도 씨를 말리려 한다. 여기서 운 좋게 살아남은 미나모토 가문의 후예들이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다시 재기하여 타이라 가문을 물리친다.
이상이 겐뻬이(源平) 전쟁의 개략적인 줄거리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면 드라마를 한층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드라마에서 다룰 <타이라노 기요모리>는 타이라 가문의 우두머리였고, <요시쯔네>는 운 좋게 살아남은 미나모토 가문의 후예로서, 미나모토 가문이 타이라 가문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드라마 <平淸盛>(타이라노 키요모리)와 <義經>(요시쯔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두 드라마에서 서로 겹친다. 그런데 두 드라마에서 같은 인물에 대해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하는가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드라마 <요시쯔네>(義經)는 2005년에 방영되었고, <타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는 2012년에 방영되었다. 그렇지만 두 드라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타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가 10-20년 정도 앞 시대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먼저 <타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를 먼저 다루고, 그다음에 <요시쯔네>(義經)을 다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