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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Apr 30. 2023

영화: 해바라기(I Girasoli)

기억상실 남편을 찾아 광활한 소련 벌판을 헤매는 여자

기억상실증은 가끔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화 <해바라기>(I Girasoli)는 2차 대전중에 참전하였다가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아 나선 여성의 이야기인데,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은 기억상실증으로 다른 여자와 결혼해 살고 있었다. 여자의 남편은 주축국의 일원인 이탈리아 군에 징집되어 대소(對蘇)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는 후퇴 중 폭설에 빈사상태가 되었는데, 그로 인해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그를 구해준 소련 여자와 결혼하여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이태리에 남은 그의 아내는 그의 죽음을 믿지 않고 그를 찾으러 소련까지 갔으나, 그의 생존과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알게 되어 그냥 되돌아온다. 


이 영화는 1970년 이탈리아에서 제작되었다. 1970년이라면 냉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고, 이 시기에는 공산권과 서방의 문화적 교류조차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 이 영화는 2차 대전 이후 최초로 소련 현지 로케로 촬영된 서방 영화라는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소련 현지 촬영은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니며, 이보다 앞서 <이탈리아의 용사들이여!>라는 영화가 최초로 소련 현지 촬영을 했지만,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탓에 사람들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못하고, 본 영화 <해바라기>가 최초의 소련 촬영 영화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소피아 로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오랜만에 그녀의 연기 모습을 본다. 그녀가 남편을 찾으러 헤매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드넓은 해바라기 밭은 실로 장관이다. 


여배우 소피아 로렌은 1960-70년대를 걸쳐 고국인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스타였다. 그녀는 대개 육감적인 여성 역으로 출연하였지만, <해바라기>에서는 남편을 찾아 넓은 소련땅을 헤매 다니는 여성 역할을 맡았는데,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없다. 역시 세계적 스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 전쟁에 나간 후 행방불명이 된 남편의 소식을 알기 위해 관계 관공서를 매일 찾아다니는 여성의 모습이 비친다. 


전쟁 중 양재 일을 하는 명랑한 나폴리 처녀 죠반나(소피아 로렌 분)와 아프리카 전선으로 향하던 중 휴가를 얻은 병사 안토니오는 나폴리 해안에서 만나 금방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곧 결혼하여 안토니오는 12일간의 휴가를 얻는다. 휴가 기간이 끝나자 아내를 두고 떠날 수 없는 안토니오는 한 제대를 노리고 정신병원을 가장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지만, 바로 거짓말이 들켜 그 징벌로서 소련 전투에 투입된다. 안토니오는 환송 나온 죠반나에게 “모피 목도리 선물 사다 줄게”라며 미소를 보이고는 기차에 실려 사라진다. 


전쟁이 끝난 후 죠반나는 남편을 기다리지만 그의 소식은 들을 길이 없다. 관청을 찾아다녔지만 그의 행방에 대해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렇게 몇 년을 기다리던 중 겨우 안토니오와 함께 복무하였다는 한 남자를 찾아낸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함께 후퇴하던 중 안토니오는 극한의 설원 위에 쓰러졌고, 자신은 그를 두고 후퇴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죠반니는 사랑하는 안토니오를 찾으러 소련에 가기로 결심한다. 


당시의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여서 죠반나가 내린 모스크바는 이탈리아와는 별세계였다. 과거 이탈리아 군이 싸웠다고 하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마을을 찾아가 주민들에게 안토니오의 사진을 보이면서 돌아다녔지만, 죠반나는 그를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죠반나의 앞에는 지평선 저쪽까지 이어지는 해바라기 밭이 펼쳐지고 있다. 많은 병사들이 이 해바라기 아래에서 잠들어 있다고 한다. 수많은 묘비가 늘어선 언덕까지 안내한 공무원은 죠반나에게 포기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단호히 “남편은 이곳에 없어요!” 하면서 그의 말을 거절한다. 

실낱같은 정보를 의지하여 모스크바로 돌아온 죠반나는 어느 공장에서 나오는 노동자들 속에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러시아인으로서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는 죠반나가 안토니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죠반나는 안토니오도 아직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안게 된다. 


말도 통하지 않는 땅에서 포기하지 않고 안토니오를 찾아다니던 죠안나는 어느 날 시골마을에서 세 명의 중년 여성에게 그의 사진을 보여주자, 그녀들은 몸짓으로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면서 그녀를 어느 아담한 집으로 데려간다. 그곳에는 젊은 아내인 듯한 러시아 여성 마샤와 그녀의 어린 딸 카츄샤가 살고 있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죠반나와 마샤는 서로의 사정을 눈치채었다. 마샤는 죠반나를 집 안으로 안내한다. 실내에는 베개가 두 개 놓인 침대가 있었다. 마샤는 떠듬떠듬한 이태리어로 안토니오와 만났던 과거의 일을 이야기해 준다. 설원에서 동사하려는 그를 자신이 구했지만, 그때 안토니오는 자신의 이름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기억이 없었다고 한다. 


드디어 기적 소리가 들려오고, 마샤는 죠반나를 역으로 데리고 간다. 기차로부터 차례차례 내리는 노동자들 속에 안토니오의 모습이 있었다. 안토니오는 달려오는 마샤를 안으려고 하지만, 마샤는 그를 제지하고는 죠반나 쪽을 가리킨다. 놀란 안토니오가 발견한 것은 야윈 죠반나의 모습이었다. 옛 남편과 아내는 거리를 둔 채로 몸도 움직이지 않는 채 서로 쳐다보고 있다. 죠반나의 표정이 슬픔으로 일그러지고, 안토니오가 뭔가 말하려고 다가서려는 순간, 죠반나는 등을 보이고는 이미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에 뛰어오른다. 그리고 좌석에 쓰러지듯이 앉자 모르는 러시아인들이 이상한 듯이 쳐다보는 속에서 그녀는 소리 높여 흐느껴 운다. 

밀라노에 돌아온 죠반나는 벽에 걸린 안토니오의 사진을 떼 던져버린다. 그 후 그녀는 자포자기에 빠져 남자들과 어울려 다니는 방탕한 생활로 몸은 점점 야위어져 간다. 그런 속에서 죠반나를 찾아온 안토니오의 어머니는 그녀의 방탕한 생활을 꾸짖지만, 죠반나는 소련에서 만난 안토니오의 이야기를 울분에 차 이야기하며 “죽은 쪽이 훨씬 좋았다”며 쏘아붙인다. 


그 후 안토니오와 마샤 부부는 신축 고층 아파트에 이사하지만 , 안토니오의 얼굴은 여전히 밝지 못하다. 안토니오는 죠반나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한다. 마샤의 허락을 받은 후 출국 허가를 받아 약속한 모피 목도리를 사서 밀라노로 향한다. 폭풍 속에서 정전된 아파트의 어둠 속에서 다시 만난 안토니오와 죠반나였지만, 감정은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한다. 안토니오는 다시 한번 두 사람이 새 출발을 하자고 호소하는데, 그때 옆방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아기를 보고 이름을 묻는 그에게 죠반나는 아기의 이름은 안토니오라고 말한다. 죠반나도 이제 다른 인생을 걷고 있다는 것을 안 안토니오는 모피 목도리를 건네주고는 소련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다음날 밀라노의 중앙역에는 모스크바행 기차에 타려는 안토니오와 그를 전송하기 위해 죠반나가 나왔다. 다시는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서로 잘 알고 있다. 안토니오는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의 창가에 선채 죠반나를 쳐다보고 있다. 멀어져 사라져 가는 그의 모습에 죠반나는 억누를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홈에서 혼자 서있다. 그를 태운 기차가 사라져 가는 이 플랫폼은 이전에 자신이 전장을 향해 떠나던 젊은 남편을 보냈던 바로 그 플랫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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