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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Jun 12. 2023

영화: 무사의 가계부(武士家計簿)

평생을 주판과 함께 살아온 회계 담당 사무라이의 일생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일본을 통일하고 동경에 막부를 개설하면서, 일본은 태평성대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일본 전국의 영토는 약 300명에 이루는 영주들에게 배분되었다. 영주들의 영지를 번(蕃, 한)이라 하는데, 그 크기는 다양하였다. 큰 영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작은 영지를 가진 영주들도 있었다. 이 시기 영지의 크기는 땅의 면적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생산되는 곡식의 양을 기준으로 하였다. 이 산출량을 석고(石高, 고쿠다카)라고 하는데, 요즘 말로 하면 GRDP(지역 내 총생산) 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 석고는 각 영주의 세력을 측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1석(1 고쿠)은 장정 한 사람이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쌀의 양이다. 영지의 산출량이 1만 석 이상인 지역의 영주를 다이묘(大名)라 하고 그 미만의 영주를 쇼묘(小名)이라고 하였다. 에도 시대에는 막부에서 각 영주들이 과대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이전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각 영주가 보유하는 군사의 수는 이 석고에 의해 자연히 결정되었다. 

카가 번의 모습

보통 100석의 산출량으로 3명 정도의 병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의 병사를 둘 경우 번의 재정이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지의 크기가 10만 석이라면 3,000명, 100만 석이라면 3만 명 정도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면 에도 시대에 세력이 가장 컸던 영주는 누일까? 막부의 수장인 도쿠가와 쇼군 가는 때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대략 500만 석 정도였다. 그러면 그다음으로 세력이 큰 영주는 누구였을까? 바로 마에다(前田) 가이다. 마에다 가문은 지금의 가나자와 시 지역 일대인 북륙(北陸) 지방의 카가(加賀) 번을 다스렸는데, 석고가 약 100만 석 정도였다. 그래서 “카가 100만 고쿠”(加賀百万石, 카가백만석)이란 말이 마치 용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기 바란다. 

https://blog.naver.com/jhlee541029/222091060299


<무사의 가계부>(武士家計簿)는 카가 번에서 재무담당 하급 관리였던 하급 사무라이 이노야마 나오유키(猪山直之)의 일생을 그린 영화로서 2010년에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무사의 가계부:  카가번 재무담당자의 막부말 유신>이라는 다큐멘터리 도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여기서는 카가번의 하급 사무라이로서 번의 회계 담당 관리로 일한 이노야마(猪山) 가에 남겨진 약 37년간의 가계부, 금전출납부를 바탕으로 그 시대의 사무라이 계층의 풍습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노야마 나오유키로서 그는 카가번의 회계 담당 관리로서 활약하여 봉록을 100석에서 180석으로 늘릴 정도로 출세를 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나리유키(成之)는 명치유신 후 해군 재무담당관(대령)으로 활약하면서 군대 회계 정착에 큰 공을 세웠다.

1842년 빚으로 집안 재정이 크게 어렵게 된 이노야마 가에서는 새로이 가장이 된 나오유키가 집안 경제를 획기적으로 개혁하려 한다. 그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빚을 모두 계산하고, 이것을 충당하기 위해서 집안에서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아치운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애지중지하고 있던 물건들을 모두 설득하여 내놓게 한 후 그것을 팔아 빚을 갚는다. 그래도 남은 빚이 있어 채무자들을 불러 모아 매년 착실히 빚을 갚을 테니 이자를 감면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렇게 하여 이노야마 가의 가정경제는 점차 건실함을 되찾아 간다. 


이노야마 나오유키는 사무라이긴 하지만 검술 실력은 형편없다. 에도시대 일본은 극단적인 신분사회로서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미래가 결정된다. 농부의 아들은 농부가 되고, 사무라이의 아들은 사무라이가 된다. 상급 사무라이(上士)의 자식은 상급 사무라이가 되고, 하급 사무라이(下士)의 자식은 하급 사무라이가 된다. 아버지가 하급 사무라이로서 번의 회계 담당 하급 관리로 일하던 나오유키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역시 회계 담당 하급 관리일을 담당하게 된다. 회계 담당 사무라이의 숫자는 50명도 넘는데, 나오유키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꼼꼼한 성격과 빈틈없는 일처리, 그리고 뛰어난 주판 실력을 바탕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회계부정을 밝혀내고 이와 타협하지 않은 공로를 인정받아 봉록도 인상된다. 

집안에서는 모든 금전출납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는 가계부를 쓰도록 한다. 어린 아들 나리유키에게도 가계부 쓰는 일을 맡겨 단 한 푼의 돈이라도 잘못 기록되는 일이 없도록 한다. 나리유키는 처음에는 이러한 아버지의 처사에 대해 반발도 하지만, 점차 아버지를 이해하고, 결국은 아버지와 같은 회계담당자의 길을 걸어간다.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에도 시대 일본은 철저한 신분사회로서 개인은 그 주어진 틀 안에서 평생을 묶여 살아야 했다. 그래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재량권이란 것이 거의 없었고, 개인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나오유키의 아버지도 역시 회계담당자였다. 그는 가족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 앞에서 틈만 있으면 과거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평생의 업적은 바로 영주의 집을 수리할 때 생긴 일이다. 대문을 새로 만들어 칠을 하여야 하는데, 돈이 부족하였다. 얼마 후 손님을 맞이하여야 하는데 큰 일이다. 그런 가운데 그는 기지를 발휘하여 문 바깥쪽에만 칠을 하고, 보이지 않는 안쪽에는 칠을 하지 않아 예산부족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것이 그가 평생에 걸쳐 자랑하는 그의 무용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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