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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May 18. 2021

영화19:아코성단절(赤穂城断絶)

츄신쿠라(忠臣藏),사무라이의 영원한 로망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춘향이 이야기? 심청이 이야기? 현대에 와서는 이들 옛날이야기의 인기가 떨어졌을지 모르겠지만, 고대소설이나 판소리 등 우리 전통 대중예술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가 춘향이, 심청이 이야기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들은 그동안 영화로, 드라마로, 소설로 수없이 제작되어 왔고, 그때마다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그러면 일본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바로 <츄신쿠라>(忠臣藏, 충신장)이다. 츄신쿠라는 억울하게 죽은 성주의 복수를 하는 47인의 무사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일본 전통 예술인 가부키, 인형극 등의 단골 상영 메뉴이며, 현대에 들어와서도 수 십 편의 영화로, 드라마로, 그리고 소설, 만화 등 다양한 장르로 재탄생하였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질리지도 않고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춘향전이나 심청전은 픽션이지만, <츄신쿠라>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츄신쿠라>를 소재로 한 여러 작품들

1701년 쇼군(將軍)의 거처인 에도성(江戸城)에서 아코성(赤穂城)의 성주인 아사노 나가노리(浅野長矩)가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에게 칼을 빼들고 덤벼, 키라에게 상처를 입혔다. 우리나라로 치면 임금이 있는 궁궐에서 신하가 칼부림을 한 사건이다. 최고의 권력자인 쇼군의 거처에서 칼부림을 하였다는 것은 용서 못할 일, 쇼군은 격노하여 당장 아사노 나가노리는에게 절복(切腹)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아사노의 영지와 그의 성인 아코성은 막부가 몰수하도록 하였다.


칼부림의 원인에 대해 아사노의 가신들은 아사노가 키라로부터 모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무엇 때문인지 이유가 분명치 않다. 여하튼 주인의 억울한 죽음과 성의 몰수로 졸지에 실업자가 된 아코성의 무사들은 절치부심, 복수를 맹세한다. 그리고 마침내 뜻을 같이하는 47인의 사무라이가 뭉쳐 키라의 저택을 습격하여 키라를 살해함으로써 복수에 성공한다.

아나노 나가노리의 난동

이러한 사사로운 복수극에 대해 막부는 발칵 뒤집혔다. 이들 무사를 엄벌에 처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주인의 복수를 한 사무라이들의 충의(忠義)를 생각하여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동정론도 많았다. 그렇지만 법을 어긴 이들 사무라이를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 결국 막부는 이 거사에 참여한 47인의 무사 전원에 대해 절복(切腹)*이라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도록 한다. 이들 아코 무사들이 죽은 후, 일본에서는 이들의 이야기가 충의(忠義)를 지킨 사무라이의 상징으로 미화되어 수많은 예술작품의 소재로 되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 우리나라에서는 배를 가르고 죽는 일본의 자살 방식을 할복(割腹)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절복(切復, 셋뿌쿠) 맞표현이다.


츄신쿠라를 소재로 한 영화 <아코성 단절>(赤穂城断絶, The Fall of Ako Castle)을 감상하였다. 내가 감상한 츄신쿠라를 소재로 한 영화로는 세 번째 영화이다. 이 영화는 1978년에 제작되었는데, 츄신쿠라를 소재로 한 25번째의 영화라 한다. 보통 츄신쿠라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47인의 무사들을 미화하여, 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아 마침내 복수에 성공하고 영광스럽게 죽어가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영화 <아코성 단절>은 과거의 이러한 포맷과는 다소 다른 관점이 이 사건을 보고 있다. 먼저 아코성의 가신들과 무사들을 무작정 미화하지는 않으며,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제일 인상 깊은 것은 성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막부의 명령으로 죽은 후 막부는 아코성 가신들에게 바로 성을 비우라고 명령하는데, 이에 대한 대응이다. 이렇게 되면 아코성의 사무라이들은 모두 바로 실업자가 된다. 가신 가운데 우두머리인 이치카와 우타에몬(市川右太衛門)은 즉시 성의 정리 작업, 즉 청산절차에 들어간다. 사무라이들의 밀린 월급을 정산하고, 그 밖에 여러 재산 처리 등 성의 인수/인계를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시켜 나간다.

영화 <아코성 단절>

또 하나 복수극에 가담한 사무라이들은 무조건 주인공에 대한 충성심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 관료에서 사회 밑바닥 생활로 떨어진 울분, 개인적 분노 등 여러 사정에 따라 거사에 참여한다. 그리고 거사에 참여를 약속하고도 두려움으로 거기서 이탈하는 자도 속출한다. 주인의 복수라는 대의명분과 현실의 생활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군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키라의 저택을 습격한 전투장면도 볼 만하다. 츄신쿠라를 소재로 한 많은 영화에서 정작 클라이맥스 장면인 저택 습격 장면은 소홀이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에서는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상당히 박진감 있게 전투 장면을 묘사하였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여러 영화상을 수상하였다. 시대극으로 괜찮은 영화라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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