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상(盤上)의 신삼국지(新三國志)-한중일 바둑쟁패전 其4
일본을 제외한다면 근대 이전에 바둑이 어느 정도 보급된 나라는 한국과 중국 정도였다. 물론 티벳이나 베트남 등 중국의 영향권에 있던 국가들에도 어느 정도 바둑이 보급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유물도 남아있지만, 실제로 바둑 인구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번에 소개한 바 있는 브런치북 <재미로 읽는 바둑의 역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은 명 및 청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사회적인 기사 양성기능을 갖추고 있고, 바둑에 관한 저서도 발간되기도 하였다. (브런치북 <재미로 읽은 바둑의 역사>는 아래 링크 참조)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극히 제한된 수의 사람들이 그야말로 도락(道樂)으로서 바둑을 즐기는데 그쳤다.
https://brunch.co.kr/brunchbook/baduk-1
400여 년 전 국내에서는 도저히 상대를 찾지 못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조선의 바둑 천재 이약사(李約史)가 혼인보 산샤(本因坊算砂)에게 3점을 놓고 졌다고 하니 대략 옛날 우리나라의 바둑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바둑 인구는 2,000-3,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우리나라는 일본은 물론 중국에 비해서도 바둑의 수준이 현저히 낮았다고 짐작된다.
195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도 전문기사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브런치북 <재미로 읽은 바둑의 역사>에서 소개한 바 있듯이 조남철 선생이 일본의 바둑전문도장인 키다니(木谷) 문하에서 바둑을 배워, 일본 프로기사로 입단한 후 귀국하여 본격적으로 전문기사 체제를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조남철의 주도로 현재의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을 설립한 후 조남철은 자신을 포함한 한국의 바둑강자들에게 프로기사 자격을 부여하고, 프로기전을 운영하였다. 한성기원은 이후 대한기원을 거쳐 한국기원으로 확대개편되었는데, 이에 따라 바둑에 대한 행정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신문사들도 프로기전을 창설하여 프로기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타이틀전이 동아일보에서 주최하는 국수전(國手戰)이었다. “국수”(國手)란 조선시대에 전국에 걸쳐 이름을 날리는 바둑의 최강자급 인물을 의미한다. 국수보다 한 단계 아래 즉, 도(道) 정도에서 이름 꽤나 날리는 사람을 도기(道棋), 그보다 아래 급으로 군 정도에서 강자로 통하는 사람을 군기(群棋)라 하였다. 유명한 국수급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재상으로 활약한 유성룡이 있다. 이런 연유로 “국수”(國手)라는 말은 전통 면에서나 호칭 면에서 지금도 우리나라 전문기사에게 최고의 경칭이 되고 있다. 옛날 중국에서도 바둑의 최강자급을 “국수”라 칭하였으며, 일본에서는 “명인”(名人)이라 하였다.
국내 강자들은 일본에서 전문기사 수업을 한 조남철에게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이 당시 이미 상당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구한말까지만 하더라도 바둑을 배우고 싶더라도 교재가 없었지만, 이 시기에는 이미 일본에서 바둑 관련 서적들이 활발히 간행되어, 이를 활용하여 독학으로 바둑수업을 하는 것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전문적인 프로기사 수업을 한 사람들에게는 어림도 없었겠지만, 구한말 및 일제강점기의 국수들 수준에 비해서는 월등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조남철을 시작으로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 등 일본 유학파들이 속속 귀국하고, 국내파 강자들의 실력도 점차 향상됨으로써, 한국바둑의 저변도 넓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일본과 한국 간에는 바둑실력에서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국내 타이틀은 대부분 일본유학파들이 차지하였다. 조남철이 10여 년 이상 절대강자로 군림하다가, 그 뒤를 이은 유학파 김인이 조남철을 물리치고 국내최강자로 등장하였다. 이어 윤기현, 하찬석 등이 귀국하여 잠깐 동안 국내 최강자 자리에 올랐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조훈현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조훈현은 9세에 이미 한국에서 프로기사로 입단하여, 프로 2단이 되어 일본에 유학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일본은 한국의 바둑 수준을 낮게 평가하여 조훈현을 일본 프로기사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프로기사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일본의 프로기사 입단 관문을 다시 통과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훈현은 다시 일본의 프로입단 테스트를 거쳐 일본 프로기사로 입문하였다. 한일 양국의 프로 관문을 모두 뚫은 사람은 지금까지도 조훈현이 유일하다. 조훈현은 오청원의 스승인 세고에(瀬越)의 문하에 들어가 바둑을 수업하게 된다. 조훈현의 실력은 일취월장하여 일본에서도 앞날이 촉망되는 신예강자로 평가를 받았으나, 병역문제 때문에 귀국하여, 곧 공군에 입대하게 된다.
조훈현은 귀국 직후에는 전반적으로 성적은 좋았다고 하지만, 기대한 만큼의 성적을 내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적응기간을 거치면서 한국 바둑계에 절대 강자로 군림하여, 국내 바둑계를 평정하였다. 그는 2차례나 우리나라의 모든 국내 기전을 싹쓸이 우승하는 전관왕(全冠王)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간혹 순수 국내파 기사인 서봉수 정도가 간간히 다리를 걸었을 뿐, 조훈현 독주체제는 그의 제자 이창호에게 무너질 때까지 거의 10년 이상 계속되었다.
또 197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 조치훈의 활약이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조남철 선생의 조카이기도 한 조치훈은 어린 나이에 일본의 기타니(木谷) 도장으로 유학을 가서 10대 후반에 이미 일본의 타이틀전에 도전자로 등장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도전자로 나선 후 두어 차례 실패는 있었지만, 마침내 염원의 타이틀을 쟁취하고, 이후 그 영역을 확장하면서 조치훈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1970-80년대 한국 바둑의 수준을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일본에 비해 한참 뒤져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였다. 한국 기계(棋界)에서도 그렇게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 바둑은 자신에 비해 훨씬 아래 수준이며,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현대바둑의 본산인 일본과 변방인 한국의 바둑 수준을 비교한다는 자체가 그들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국에서 바둑유학을 와서 일본 프로기사로 입문하긴 했지만 이름조차 변변히 알려지지 않았던 기사들이 한국에 돌아가서는 한국바둑을 평정하곤 하였기 때문이다.
대만 출신의 임해봉(林海峰, 린하이펑)이 일본기계의 최정상급으로 활약하고, 뒤이어 한국출신의 조치훈이 새로운 신흥강자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비록 국적은 대만과 한국이었지만 한 사람의 기사(棋士)로서는 일본바둑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찍이 일본에 유학 와서 일본의 바둑환경에서 일본사람에게 바둑을 배웠으며, 일본 기계에서 활약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일본바둑계의 일원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조치훈이 일본에서 메이저 타이틀인 기성(棋聖), 본인방(本因坊), 명인(名人) 위를 잇달아 쟁취하자, 국내에서는 조치훈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는 국민영웅이 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수많은 바둑 타이틀전이 있었지만, 기성, 본인방, 명인 3개의 타이틀은 상금규모부터가 다른 타이틀과는 격이 달랐다. 이들 타이틀전의 우승 상금은 3천만 엔 이상이었는데 비하여 다른 타이틀전은 아무리 많아야 1천만 엔을 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세 타이틀을 동시에 차지하는 것을 대삼관(大三冠)이라고 하는데, 일본 바둑의 역사상 조치훈이 최초의 대삼관을 차지하였다.
조치훈이 금의환향했을 때 한국기원과 KBS 등 국내 언론은 조치훈과 조훈현의 특별대국을 마련하였다. 조훈현은 이 당시 국내의 모든 타이틀전을 석권한 전관왕이라는 절대 강자의 지위에 있었지만, 일본에서 메이저 타이틀을 차지한 조치훈에 비해서는 인기면에서 비교가 되지 못하였다. 조치훈과 마주한 한국 최강자 조훈현은 너무나 초라하였다.
TV에서 생중계된 두 판의 대국에서 조훈현은 조치훈에게 두 판 모두를 패하게 된다. 사람들은 조치훈의 실력에 환호성을 질렀고, 조훈현이 진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조훈현은 이때의 참담했던 심경을 여러 차례 털어놓은 바 있다. "그래, 네가 한국 최강의 바둑이라고 까불더니,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 아니었더냐?" 사람들이 이렇게 모두 자기를 조소((嘲笑)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의 자존심은 걸레처럼 찢겨나갔다. 그는 그날 조치훈과의 시합에 지고, 비 오는 저녁 길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며 비참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이 시합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시 일본 바둑이 세군. 우리나라 기사들은 일본기사에 어림도 없어.”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2016년 7월 작성, 2023년 9월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