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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Sep 17. 2023

일본 바둑의 전성기와 기라성 같은 절대 강자들

반상(盤上)의 신삼국지(新三國志)-한중일 바둑쟁패 전 其3

1960-80년대 일본은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1964년 동경올림픽을 계기로 명실상부하게 선진국의 반열에 진입하였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는 조만간 미국경제를 추월하리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평화와 풍요, 이것만큼 이 시기의 일본을 특징짓는 단어도 없으리라. 일본사회는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돈이 넘쳐 났고, 국민들의 자신감은 넘쳐났다. 평화로운 세상, 풍요한 생활은 곧 문화의 발전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사회전반의 여건에 힘입어 일본 바둑은 바야흐로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기라성 같은 절대강자들이 새로이 속속 등장하였다. 바둑에 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져 기전(棋戰)을 주최하는 신문사들은 앞 다투어 상금을 올려 규모를 키웠다. 이러한 바둑에 대한 사회적 관심에 대응하여 새로운 기전들의 속속 신설되었다. 바야흐로 일본 바둑의 황금시대, 기사들의 전성기가 새로이 도래한 것이었다. 


바둑 붐에 힘입어 정상급 기사들의 세대교체도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면도날” 사카다 에이오(坂田英男), “너구리” 다카가와 카쿠(高川格), “괴물” 후지사화 슈코(藤沢秀行) 등 원로기사들이 서서히 퇴진하고, 키다니(木谷) 도장 출신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기라성(綺羅星) 같은 신흥강자들이 등장하였다. 


오다케 히데오(大竹英雄)를 시작으로 일본 바둑은 키다니 미노루(木谷実) 문하의 시대가 열린다. 이 당시 일본바둑계를 풍미한 인물들로서는 “이중허리” 임해봉(林海峰, 린하이펑), “살인청부업자”(殺し屋, 코로시야) 카토 마사오(加藤正夫), “미학”(美學) 오다케 히데오(大竹英雄), “우주류”(宇宙流) 타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임해봉을 제외하고는 모두 키다니 문하였다. 이들은 한 시대를 풍미한 기사들로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팬들이 있다. 


특히 <타케미야>는 우주류라는 그 호방하고도 낭만적인 기풍으로 인하여 아마추어 애기가들에게는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요즘은 좀 달라졌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타케미야는 일본에서는 물론 우리나라 애기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 있는 기사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임해봉과 오다케의 뒤를 이어 일본바둑의 정상을 차지한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 카토 마사오(加藤正夫),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도 모두 키다니 문하이다. 이들 세 명은 “키다니의 세 마리 새”(木谷三羽烏)라고 불렸다. 1990년대까지 기타니 문하생들 간에 타이틀을 뺏고 빼앗기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기타니 도장의 황금시대의 서막에 불과하였다. 


세 마리 새를 능가하는 두 명의 키다니 도장 출신 절대강자가 출현하였다. 바로 조치훈과 고바야시 코이치(小林光一) 9단이다. 이 둘 가운데 나이는 고바야시가 많았지만 성적은 조치훈이 좀 더 앞서 갔다. 이들 두 사람은 일본의 거의 모든 바둑타이틀전을 휩쓸어버렸다. 조치훈은 통산 76개의 타이틀을 획득하였는데, 이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공적으로 조치훈은 “명예 명인”이면서 25세 본인방(二十五世 本因坊治勲)이다. 조치훈의 뒤를 이어 이야마 유타(井山裕太) 72개, 사카다 에이오 64개, 고바야시 코이치 60개, 오다케 히데오 48개 순으로 이어진다. 


중국은 우리나라보다도 바둑의 발전이 더 늦었다. 우리나라가 그래도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에 걸쳐 프로 바둑이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기틀을 잡기 시작한데 비하여 중국은 1970년대까지는 바둑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공산주의 사회인 중국에서 일은 하지 않고 베짱이같이 매일 빈둥빈둥 놀면서 신선놀음만 하는 바둑기사들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뻔한 일이라 할 것이다. 


문화혁명기(文化革命期)에는 바둑은 자본주의적인 허접한 오락이라 간주하여 바둑 두는 사람을 모두 시골로 추방하였다. 이른바 하방운동(下放運動)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화이트칼라 직업계층을 시골로 내려 보내 거기서 밑바닥부터 육체노동을 하여 인민들의 어려움과 공산주의 정신을 가다듬으라는 것이었다. 이때 대부분의 화이트칼라 계층들이 시골로 쫓겨 갔는데, 거기에는 바둑기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후에 일본의 기라성 같은 바둑강자들을 떨게 만든 녜웨이핑(聶衛平)도 이때 시골로 쫓겨 내려가 갖는 고생을 하였다. 후에 그는 당시의 비참했던 생활과 절망감에 대해 여러 차례 토로한 바 있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개혁개방운동이 확산되자 바둑은 다시 대중으로 보급되었다. 옛날과는 달리 일본에서 발간되는 바둑책들이 많았기 때문에 독학으로도 어느 정도 실력을 닦을 수 있게 세상 환경이 바뀌었다. 


핑퐁외교로 시작된 미중 국교회복 이후 중국은 적극적으로 대외 개방정책을 취하였다. 중국이 대외개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자, 일본은 중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전방면에 걸쳐 대중교류(對中交流)를 활성화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 일본은 중국을 중시하여 여러 면에서 중국을 지원하였다. 산업, 자본 등 경제 분야는 물론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중국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높여 나갔다. 


이 시기 조훈현 9단의 사실상의 스승이기도 한 고(故) 후지사와 슈코(藤沢秀行) 9단이 중국바둑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많은 프로기사들을 데리고 중국에 가서 바둑교류전을 열기도 하였으며, 바둑 관련 서적과 용품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중국 내의 바둑열기와 이와 같은 외부의 지원에 의해 중국의 바둑실력은 빠른 속도로 향상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바둑이 제아무리 빠른 속도로 향상되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아마추어. 400년 이상 프로제도가 정착되어 기량을 닦아온 일본에는 그 실력이 도저히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였다. 또, 중국 바둑을 경험한 일본기사들도 그들과 중국기사들 간에는 상당한 기량의 차이가 있어서 중국 톱 레벨의 기사들이라 할지라도 일본의 강자들과는 승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공통된 생각이었다. 


중국바둑을 얕잡아 보기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바둑에 있어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실력은 천지 차이이며,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아무리 강자라 소문이 난 아마추어 기사라 하더라도 막상 프로기사와 승부를 겨루게 되면, 중하위급 프로에게도 이기는 경우가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다. 이런 당연한 현실에서 프로기사가 아닌 아마추어 중국 기사가 한국의 프로기사와 승부가 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당시 중국의 최강자로 알려진 녜웨이핑(聶衛平)이 일본에서 개최하는 세계 아마추어 바둑대회에 참가하여 몇 번 우승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간의 시합. 어차피 프로와 아마추어 간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만큼 중국의 바둑 수준은 우리나라에 비해 한참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 모두의 생각이었다.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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