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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Sep 27. 2023

중일슈퍼바둑대회: 중국의 도전과 일본의 대망신

반상(盤上)의 신삼국지(新三國志)-한중일 바둑쟁패전 其5

1984년 중국과 일본 간에 <제1회 중일(中日) 슈퍼바둑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중국에 대한 바둑지원 및 교류에 헌신하였던 <후지사와 슈코>(藤沢秀行) 명예기성(名譽棋聖)의 적극적인 활약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기전은 일본과 중국의 최정상급 기사들 간 국가의 명예를 건 국가대항전(國家對抗戰) 시합이었다. 
 
 이 시합은 물론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일본 양국 간 바둑실력을 겨룬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바둑선진국인 일본이 중국의 바둑발전을 지원한다는 문화교류적 성격이 강하였다. 즉, 교류전을 통해 중국바둑을 지원하고, 그럼으로써 중국바둑의 수준을 높인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고수로서 하수인 중국에게 한 수 가르쳐준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중일슈퍼바둑대회>는 중국과 일본의 기사가 각각 8명씩 출전하여 겨루는 국가대항전 형식의 시합이었는데, 시합은 승발전(勝拔戰)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승발전이란 양측에서 한 명 씩의 기사가 나와 대국을 하고, 이긴 사람은 다음 사람과 대국을 하는 방식이다. 현재 <농심신라면배 한중일 바둑대회> 등 몇 개의 국제기전과 <신사 대 숙녀의 바둑대회> 등 국내기전이 이러한 승발전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승발전의 묘미는 지고 있는 팀에서 강자나 컨디션이 좋은 선수가 나오면 올킬을 통해 역전승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극단적인 경우 한 선수가 상대방 선수들을 모두 꺾어버릴 수도 있다. 실제로 <농심신라면배 한중일 바둑대회>의 전신인 「진로배 바둑대회」에서 우리나라 2장 선수로 나선 서봉수가 중국과 일본 선수 9명을 혼자서 모두 꺾어버리고 우승한 적이 있다. 서봉수 뒤에 남은 우리나라의 나머지 세 선수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은 바둑 한판 두지 않고 우승상금을 나누어 가졌다. 부럽다. 그 외에도 이창호는 역시 <농심신라면배>에서 3명의 최고수가 남아있는 중국을 상대로 한국팀의 마지막 주자로 나와 중국의 남은 선수를 모두 올킬시켜 버리는 기적을 연출한 적도 있다. 


여하튼 본론으로 돌아가, 제1회 중일슈퍼바둑대회에서 일본 측은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고바야시 사토시>(小林覚), <카타오카 사토루>(片岡聡), <고바야시 코이치>(小林光一), <카토 마사오>(加藤正夫), <후지사와 슈코>(藤沢秀行) 등 일본의 초일류기사를 총출동시켰다. 선수 하나하나 누구라도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한다 한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선수 면면이었다. 승발전 방식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강력한 선수진을 구성한 일본팀은 2장(二將) 내지는 3장(三將) 정도에서 중국기사들을 전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예상들이었다. 
 
 일본기사들은 이 행사를 명예를 건 진검승부의 시합이라기보다는 한수 아래인 중국바둑을 지도한다는 기분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시합에 임하였다. 승부에 대한 걱정보다는 일본이 너무 일방적으로 이겨 모처럼의 친선의 목적으로 마련된 이 대회가 중국팀의 일방적은 패배로 퇴색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우려의 생각조차 있었다. 중국에 좀 양보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일본선수단 안에도 있었지만, 어떤 대국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의 프로기사들의 정신이라는 점에서 그럴 수도 없었다.  
 
 이렇게 하여 <제1차 중일(中日) 슈퍼바둑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누구도 예상 못한 천지가 요동칠 결과가 나왔다. 일본팀이 간단히 우승하리라는 전망과는 달리 일본팀은 예상외로 고전하였다. 일본팀의 제1장으로 등장한 신예 강호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5단은 중국의 제1장을 가볍게 물리쳤으나, 두 번째 상대인 중국팀 2장 강주주(江鋳久) 7단에게 예상외로 패배하였다. 그런데 강주주 7단의 선전은 여기서 멈추치 않았다. 당시 최강 조치훈과 고바야시 코이치를 이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던 3장 고바야시 사토루(小林覚), 이와지 슈죠(淡路修三) 9단, 가타오카 사토루(片岡聡) 7단, 이시다 아사라(石田章) 9단 등 모두 5명의 일본기사들을 단숨에 꺾어버린 것이다. 강주주 9단은 한때 세계여류바둑 일인자로서 우리나라에서도 활동하기도 했던 루 나이웨이 9단의 남편이기도 하다. 강주주 9단도 2000년대에 들어 잠시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바 있다. 


남은 선수는 중국 7명, 일본 3명. 일본팀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일본 선수들이나 국민들은 물론 중국인들조차도 이러한 결과를 믿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당시 조치훈과 일본 최강자 자리를 놓고 다투던 <고바야시 코이치>(小林光一) 9단이 6장으로 나서면서 전세는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고바야시> 9단은 중국의 2장 강주주 9단부터 시작하여 7장까지 6명의 중국기사들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이로서 일본팀은 늦으나마 겨우 체면을 되찾는 듯 보였다. 중국은 이제 단 1명 주장 혼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고바야시> 9단을 포함하여 최정상급 기사 3인이 건재해 있었다. 
 
 한 명만 남은 중국팀은 마지막 선수를 내보냈다. 그가 바로 중국이 낳은 불세출의 바둑천재라 하는 <녜웨이핑>(聶衛平)으로서, 우리가 보통 섭위평이라 부르는 기사이다. 그는 후에 절정의 최전성기에 조훈현이라는 한국의 전신(戰神)을 만나 내리막길을 걷게 되지만, 이때만 해도 외국에 아직 제대로 그 실력이 알려지지 않은 신예 기사였다. 물론 아마추어 세계바둑대회에서 몇 번인가 우승한 전적이 있지만, 원래 바둑에서 아마추어와 프로의 실력은 천지 차이이다. 
 
 그런데 <녜웨이핑>은 등장하자마자 일본바둑의 양강(兩强) 가운데 하나인 <고바야시 코이치>(小林光一)를 단칼에 보냈고, 이어 등장한 살인청부업자라는 별명을 가진 대마킬러인 7장 <카토 마사오>(加藤正夫)도 <녜웨이핑>의 검기(劍氣)의 제물이 되었다. 그리고 등장한 일본의 마지막 주자는 주장인 괴물 <후지사와 슈코>(藤沢秀行). 일본 최대기전인 기성위(棋聖位)를 4년 연속 제패한 바 있는 걸물로서, 일 년에 바둑 4판만 이기면 충분하다고 호언하던 기사이다. 기성전 결승전이 7판 4 승제이므로, 다른 시합은 전패를 하더라도 4판을 이겨 기성전만 방어한다면 일본 랭킹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후지사와> 마저도 <녜웨이핑>의 예리한 칼날을 비켜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네 웨이핑>은 3명의 일본 최고수들을 물리치고 <제1회 중일슈퍼바둑대회>에서 중국팀에 우승을 바친 것이었다. 그가 중국 대륙의 열화 같은 환호성 속에서 쟁취한 우승배는 중국팀, 아니 조국 중국에 바쳐진 값진 선물이었던 것이다. 수천 년 전 바둑이라는 두뇌 게임을 창안하였지만, 현대에 와서 일본에 종주국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중국으로서는 자존심을 찾은 날이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은 선수단은 물론이고 바둑계 전체가 패닉에 빠졌다. 이제까지 몇 수 아래로 생각해 왔던 중국에게 일본의 초일류기사들이 졌다고 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녜웨이핑>이라는 한 사람의 기사에 의해 3명의 초일류 고수들이 쓰러졌다는 것이... 
 
 일본 기계(棋界)에서는 “적을 가볍게 보면 반드시 진다”(輕敵必敗)라는 바둑교훈을 들어 일본 선수단을 꾸짖었다. 선수단 전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패배에 대한 반성의 뜻으로 모두 삭발(削髮)을 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계속)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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