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형 Oct 03. 2023

진검승부의 시작, 세계바둑대회의 창설 움직임

반상(盤上)의 신삼국지(新三國志)-한중일 바둑쟁패전 其7

바둑도 이제 세계적으로 보급되어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바둑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최고 수준의 기사들은 여전히 한, 중, 일의 동양 삼국에 국한되어 있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세 나라의 각국의 바둑실력을 비교할 객관적인 근거는 없었다. 어쩌다 다른 나라 기사들과 친선대국 같은 것은 열리기도 했지만, 각 국의 최강자들 간의 진정한 승부는 없었다. 프로바둑의 대형 스폰서는 대부분 일본에 있었고, 이들은 일본바둑을 세계최고로 알고 있었으므로 구태여 허접한 변방의 기사들과 자국의 강자들 간의 승부의 장을 만들 유인이 없었다. 세계대회라 해봤자 일본 기사들의 독무대가 될 것이고, 결국은 일본 국내 타이틀전과 차별성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아직 바둑의 걸음마 단계였고, 그리고 당시 중국의 경제 수준으로는 세계바둑을 주관할 기반이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바둑 수준이 일본보다 한참 뒤진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국제대회를 개최할 의미도 없었고, 또 그럴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프로 최정상의 기사들은 대부분 일본 유학파인 데다, 조훈현을 제외하고는 일본 프로세계에서 그다지 성적을 못 낸 기사들이 한국에 돌아가서는 정상을 차지하는 걸로 봐서 실력이 일본에 비해 한참 낮은 걸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기사들은 일본바둑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있었다. 
 
정말 일본의 실력이 가장 뛰어날까? 아니면 중일슈퍼대항전에서 보여준 것처럼 중국이 이미 일본을 극복했을까? 한국도 엄연히 프로제도가 있고, 수 십 명의 프로기사가 있는데, 그저 변방에 불과할까? 과연 동양 삼국의 바둑을 비교하면 누가 가장 뛰어나고, 또 실력의 차이는 어느 정도일까? 
 
1980년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약 400명에 가까운 프로기사들이 있었는데, 한국은 7-8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정상급 기사의 실력이라 해봤자 일본의 중하위급 기사들과 비슷한 정도의 실력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 한국기사들도 자존심은 상하지만 내심 그 정도일 것으로 수긍하였다. 
 
중국의 경우 중일슈퍼대항전을 통해 중국기사들의 기량이 크게 향상된 것으로 밝혀졌으나 <녜웨이핑>, <마샤오춘> 등 몇 명을 제외한다면 역시 일본의 중하위 프로정도의 실력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일본에서는 <중일슈퍼대항전>에서 녜웨이핑에게 창피를 당한 것은 실수이고 운이 나빴을 뿐이라는 인식이 강하였다. 프로의 승부는 상금이 말하는데, 재미 삼아 중국에 놀러 가서 상금도 없는 친선대회에서 심심풀이로 바둑을 두었기 때문에 졌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중국의 바둑저변은 일본에 비해 좁고, 선수층도 얇으므로 아직 일본의 적수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중국인이 만들어낸 최고의 두뇌 기예(技藝)인 바둑이라는 게임을 일본이 꽃피우고, 일본이 세계바둑의 본산으로 자리 잡은 데 대해 자존심이 상해있었다. 그러던 차에 <녜웨이핑>이라는 불세출의 고수가 나타나 기라성(綺羅星) 같은 일본의 최강자들을 모두 쓰러뜨림으로써 이제 중국인이 세계바둑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되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서 시작된 것이 세계바둑대회이다. 즉, 누가 세계 최정상의 기사인지 실력으로 맞 겨뤄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응창기(應昌期, 잉창치) 배 세계바둑선수권전>. 응창기 씨는 대만의 대부호로서 바둑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세계 바둑의 공통 룰인 일본식 바둑룰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새로운 바둑룰을 만들어낼 정도로 바둑에 대한 관심이 컸다. 그런 응창기 씨에게 있어서 <중일 바둑슈퍼대항전>에서 기라성같은 일본의 고수들을 물리치고 중국팀에 우승컵을 바친 녜웨이핑은 세계 최고의 기사로 생각되었다.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제정한 새로운 바둑룰을 보급하기 위해 그는 세계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심하였다.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였다. 응창기(應昌期) 씨는 세계바둑계의 최강자를 가리기 위해 매 4년 올림픽이 개최되는 해에 “바둑올림픽”을 개최하기로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것이 바로 <응창기(應昌期, 잉창치) 배 세계바둑선수권전>. 우승상금은 무려 40만 달러로 현재가치로 5억 원에 가까운 큰돈이다. 당시 우리나라 주요 기전의 우승상금이 대개 1천-3천만 원 정도 되었으니 응창기배 상금의 크기에 상상이 갈 것이다. 
 
응창기 씨는 중국바둑의 실력이 이미 일본을 넘어섰으며, 녜웨이핑은 세계최강의 기사라고 굳게 믿었다. 응창기배 바둑대회는 급성장하여 세계바둑의 중심으로 등극한 중국 바둑의 위상과 세계 바둑의 최강자는 바로 중국인 녜웨이핑이라는 사실을 세계의 바둑계에 확인시키기 위해 만든 대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응씨배 바둑대회의 개최가 결정되자, 일본은 서둘러 「후지쯔배 세계바둑대회」(富士通盃世界囲碁大會」를 만들어 응씨배에 앞서 대회를 개최했으나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그렇지만 후지쯔배는 최초의 세계바둑대회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후지쯔 배는 이후 매년 개최되었다. 
 
2016년 8월

작가의 이전글 영화: 리얼 파이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