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형 Oct 06. 2023

최초의 세계바둑대회와 “세계 8강” 차민수

반상(盤上)의 신삼국지(新三國志)-한중일 바둑쟁패전 其8

1988년 최초의 세계 바둑대회인 "후지쯔배 세계바둑대회"가 열렸다. 일본 기업인 후지쯔 사가 스폰서를 맡은 이 대회에는 한중일 선수들을 비롯하여 미국, 유럽 대표 1인씩을 포함하여 모두 16명이 참가하여 토너먼트로 시합이 진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훈현과 서봉수, 장두진 3명의 기사가 참가하였으나 조훈현은 일본의 고바야시 코이치에게, 서봉수는 일본의 임해봉에게, 장두진은 중국의 마효춘에게 모두 1회전에서 패배하여 탈락하였다. 4강에는 고바야시 고이치(일본)와 다케미야 마사키, 임해봉(일본)과 중국의 녜웨이핑이 올랐으며, 결승에서는 다케미야 마사키와 임해봉이 대결하여 다케미야가 우승을 차지하였다.


우리나라는 당시 랭킹 1, 2, 3위가 참가하였지만 모두 1회전에서 탈락하여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하였다. 8강에는 일본 6인, 중국 2인, 4강에는 일본 3인, 중국 1인이 올랐고, 결승전은 일본 대표들 간에 이루어져 결국 일본이 우승과 준우승을 모두 차지하는 결과가 나왔다. 우리로서는 일본과의 격차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중국 바둑도 상당히 강해졌다고 하지만, 큰 상금이 걸린 최초의 세계대회에서는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결과가 나와 일본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후지쯔 배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기서 또 잠깐 옆길로 빠지자. 1989년 제2회 후지쯔 배 대회에서 이변 중의 이변이라 할까, 돌풍이 일어났다. 그 주인공은 소설 및 TV 드라마, 그리고 영화로도 소개된 바 있는 갬블링 스토리인 <올인(All-in)>의 주인공인 차민수 4단.
 
차민수는 한국에서 프로기사로 입단한 후 초단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갬블링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후 그는 포커 분야에서 세계적인 플레이어로 성장하였다. 차민수는 프로기사이긴 하지만 이미 십 수년 이상 바둑과는 멀어져 있었다. 그의 활동무대는 이미 바둑이 아니라 포커의 세계였다. 그런 그가 <제2회 후지쯔배 세계바둑대회>에 미국대표 선수로 초청되었다.
 
후지쯔배 대회는 세계바둑대회라는 구색을 갖추기 위하여 서양 선수들도 초청하였다. 이에 미국대표 선발전이 개최되었는데, 이 선발전에는 미국에 거주하는 바둑 꽤나 둔다고 하는 선수들이 모두 참가하였을 것이다. 그래봤자 어차피 대부분은 아마추어. 한중일의 프로기사들과는 몇 단계 수준이 떨어지는 선수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 선발대회에서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자는 마이클 드먼드(Michael Redmond) 7단이었다.
 
<마이클 드먼드>는 어엿한 프로기사이다. 그것도 당시 세계바둑의 본산인 일본의 프로테스트를 통과한 정식 프로기사. 그는 미국에서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와서 각고의 노력 끝에 실력으로 일본 프로 테스트를 통과하였다. 그리고 승단대회에도 꾸준히 참가하여 7단까지 승단하였다. 이후 그는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바둑보급과 바둑의 세계화를 위해 다방면으로 활약하였다. 지난번 이세돌과 알파고가 대결을 벌였을 때 영어해설을 담당하였던 벽안(碧眼)의 기사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그 드먼드 7단이었다.  
 
일본 프로 7단의 전문기사가 미국대표 선발전에 참가하였으니, 그의 우승은 불을 보듯 뻔하였다. 그런데 그런 드먼드를 바로 차민수가 꺾어버리고 미국대표선수로 선발된 것이다. 사실 후지쯔배 대회는 명칭이 세계바둑대회인 만큼 한중일 3국의 선수만으로 시합을 한다는 것도 그렇고 해서, 구색 맞추기 용으로 미국과 호주 선수도 초청하였는데, 차민수가 바로 구색용 선수로서 미국대표로 선발된 것이다.


차민수는 한국에서 프로에 입문한 후 초단 시절 곧 미국으로 이민 갔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이름이 생소한 기사였다. 그리고 한국에 프로기사로 있을 때에도 그다지 눈에 띄는 성적을 올린 기사는 아니었다. 차민수가 프로 4단이라는 것도 실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는 초단인데, 미국에서 바둑보급을 한다니까, 선수 사기 진작 차원에서 한국기원이 일종의 명예 단으로 승단시켜 준 것이다. 차민수는 또 후지쯔배에 "M. Cha"란 이름으로 미국대표선수로 등록하였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시합이 시작될 때까지 그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조차도 모를 정도로 무명의 기사였다.
 
그런 사람이 세계바둑대회에 출전을 했으니, 1회전에서 탈락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대회 주최 측인 일본으로 봐서는 바둑 변방인 한국의 프로기사로서, 거기다 한국에서조차 변변한 성적을 올리지 못하였고, 또 미국으로 건너가 10년 이상 바둑승부에서 멀어져 있던 무명의 기사가 세계바둑대회에서 쟁쟁한 프로기사들과 맞서 1승이라도 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 차민수가 24강전에서 그 당시 일본에서 최강 조치훈의 뒤를 이를 것이라 평가받고 있던 신예강자 야마시로 히로시(山城宏) 9단을 꺾어버린 것이었다. 야마시로 히로시가 누구인가? 카타오카 사토시(片岡聡), 고바야시 사토루(小林覺) 등과 함께 일본바둑의 미래를 짊어질 3명의 촉망받는 젊은 기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는 당시 일본 랭킹 10위 안에 드는 초강자였다. 당시 일본에서 이 대국 중계방송 해설을 하던 타케미야 마시키(武宮正樹) 9단이 하도 어이가 없어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군요, 거참...” 하면서 허탈하게 그냥 허허 웃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상대는 일본에서 대마 사냥꾼이라는 별명을 가진 오히라 쥬조(大平修三) 9단이었다. 비록 노장이지만 1960-70년대 일본 최정상급 기사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차민수가 또 이겨버렸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퇴물 프로골퍼가 전성기를 약간 지난 타이거 우즈와 1:1로 골프를 쳐 이겨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차민수는 일약 “세계 8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차민수의 전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상대는 한국 최강의 기사 조훈현. 그 조훈현을 맞아 차민수는 끝내기에 돌입하기 직전까지 압도적인 우세를 견지하였다. 흔히 말하는 어떻게 두어도 질 수 없는 바둑,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조훈현을 몰아넣었다.
 
그렇지만 여기서부터 조훈현의 처절한 끝내기가 시작되고, 차민수의 연달은 실수가 나오면서 조훈현은 지옥의 문턱에서 회생하였다. 이 대국을 두고 항간에서는 차민수가 한국기사의 우승을 위해 조훈현에게 일부로 져주지 않았느냐라고 하는 소위 “승부조작”의 루머가 돌기까지도 하였다. 하도 말도 안 되는 역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차민수는 후일 이렇게 회고하였다. “일부러 져 준 것은 아니다. 다만 승부가 이제 거의 끝장났다고 생각하니, 한국 언론에서 어떻게 떠들까, 그리고 인터뷰에 어떻게 응할까 등 여러 생각이 주마등같이 떠올랐다. 조훈현을 이김으로 해서 내게 쏟아질 각광, 각계로부터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등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자꾸 실수가 나왔고, 결국 승부에서 져버렸다”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차민수는 또 다음 해 제3회 후지쯔배 대회에서는 당시 일본 최강인 조치훈 9단을 꺾어버리는 이변을 연출하였다. 실로 그는 “후지쯔배의 사나이”였다.
 
2016년 8월

작가의 이전글 영화: 붉은 10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