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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Oct 20. 2023

한국바둑의 도약과 사천왕: 전신(戰神) 조훈현

반상(盤上)의 신삼국지(新三國志)-한중일 바둑쟁패전 其11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세계바둑의 본산으로서, 실력 면에서도 최고였다. 일본의 최강자가 바로 세계의 최강자였다. 일본에서 연구된 새로운 수들은 다른 나라에도 바로 퍼져나갔다. 우리나라나 중국의 전문기사들은 일본 전문기사들의 실전대국이나 일본에서 연구된 수들을, 그리고 일본에서 출판된 바둑 관련 서적을 교재로 바둑공부를 하면서 실력을 키웠다. 
 
실력 면에서나 전통 면에서, 그리고 문화면에서 일본은 세계바둑의 중심지였고, 일본은 그러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국내 기전은 큰 인기가 있었다.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바둑계에서 조치훈의 활약이 두드러지자, 우리나라에서도 오히려 국내 기전 보다 일본 기전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더 높아졌다. 


이렇게 세계바둑의 판도는 일본이 지배하면서 한국과 중국이 멀찌감치 뒤에서 이를 쫓는 형국이 되었다. 그렇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과 중국의 바둑실력이 무섭게 늘기 시작하였다. <중일슈퍼대항전>에서 중국이 일본을 꺾고 승리하기도 하고, 제1회 <응창기배 대회>에서 한국이 우승하는 등 세계바둑에 있어서 일본의 독보적인 위치가 서서히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응창기배>, <후지쓰배>를 시작으로 국제기전이 속속 탄생하게 된다. 한국, 일본, 중국이 각각 몇 개씩의 세계대회를 창설하다 보니까, 1990년대 후반이 되면서 메이저급 세계대회만 하더라도 매년 6-7개가 개최되었으며, 규모가 작은 대회까지 합하면 연간 10개가 넘게 되었다. 드디어 바둑이 각국의 국내의 영역을 넘어 세계를 무대로 서로 경쟁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국제 바둑대회는 각국의 고수들이 총출동하여 진검승부를 벌이는 장이다. 따라서 국제 기전이 확대됨으로 해서 누가 진짜 실력자인지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애기가들 막걸리 한 잔을 앞에 두고 바둑의 전통이나 무용담을 주고받으면서 누가 실력자인지, 누가 최강인지 다투는 시대는 지났다. 김두한이 최고 주먹인지 시라소니가 최고 주먹인지는 말로 다툴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맞짱을 떠서 이기면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 주먹이 되는 것이다. 국제기전은 바둑세계에 있어 바로 이렇게 최강자들에게 맞짱을 뜰 수 있게 하는 결투의 장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바둑의 국제화 분위기 속에서 19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한국바둑은 급속히 성장하게 된다. 이창호를 비롯한 신예 기사들의 실력이 급상승하였으며,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등 고참 기사 및 중견기사들도 각종 세계대회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리하여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국제대회에서 한국과 일본이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한국의 우세로 기울어지게 된다. 


한국바둑의 사천왕(四天王)이라는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조훈현과 서봉수는 고참 기사답게 한국바둑을 이끌었으며, 한국최강 조훈현의 유일한 제자인 이창호는 스승을 능가하는 실력으로 한국바둑의 중심이 되었다. 이들 4명의 기사들은 처음에는 “4인방”으로 불렸으나, 좋지 않은 표현이라 하여 나중에는 “사천왕”으로 불렸다.  


사천왕이란 불교에서 나온 용어이다.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의 중턱에 있는 사왕천(四王天)의 주신(主神)인 네 명의 외호신을 의미한다. 불교가 사회를 지배하였던 일본에서는 한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4명의 인물들을 사천왕으로 불렀다. 대표적인 것으로 “도쿠가와(德川) 사천왕”이라는 말이 있는데, 도쿠가와 막부의 수립에 공헌한 4인의 무장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사인방”이란 원래 중국의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권력을 휘두르던 4명의 공산당 지도자인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 야오원위안(姚文元) 정치국 위원, 왕훙원(王洪文) 부주석, 장춘차오(張春橋)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4인방으로 지목되어 체포되면서 문화 대혁명이 막을 내렸다. 


문화 대혁명은 중국을 크게 퇴행시킨 반동적인 사건이라 평가되고 있는데, 실제로 이 기간 중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는 크게 퇴보하고, 경제도 뒷걸음쳤다. 사인방(四人幇)의 방(幇)은 “악당”(gangster)이란 뜻으로 좋지 않은 의미이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1980-90년대 한국 바둑을 이끌었던 4명의 기사들을 “사인방”이라 하기보다는 그래도 “사천왕”이라는 표현이 나은 것 같다.  


이 4명의 기사들은 각자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조훈현은 9세에 이미 프로 입단 관문을 통과하였고, 11세에 일본기원의 프로 입단 관문을 다시 통과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천재형의 기사이다. 어릴 때부터 이미 기재를 인정받았고, 강자가 즐비한 일본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려 앞날이 유망한 신예 기사로 평가를 받았지만, 꽃을 피우기 전에 병역문제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본에서 정통 바둑을 수련받았기 때문에 매우 기초가 탄탄한 바둑이다. 그의 바둑은 매우 날렵하며, 속도감 있어 경쾌하다. 전성기의 무하마드 알리를 연상시키듯이 가벼운 잽을 툭툭 던지며 발 빠르게 판을 주도해 나가는데 그 몇 번의 잽으로 상대방은 이미 그로기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흔하였다. 


조훈현의 행마가 하도 빠르고 경쾌하기 때문에 그의 별명은 “제비”로 붙여졌다. “조 국수”라는 호칭과 함께 “조 제비”라는 별명도 많이 불리어졌다. 그런데 제비는 봄을 알려주는 반가운 새이긴 하지만 동시에 우리나라에서는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지금은 제비란 말이 별로 사용되지 않지만 옛날 카바레에서 유부녀와 춤을 추며 여자들에게 기생하는 사기꾼 비슷한 남자를 “제비”라 불렀다. 1960년대는 물론 1980년대까지 “제비”에게 피해를 당한 여자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언론을 장식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옆길로 빠지자. 여자들에게 접근하여 기생하는 남자들을 왜 “제비”라고 할까? 


20세기 초 일본에 히라쓰카 라이테우(平塚雷鳥)라는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그 당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서구유학을 통해 신식교육을 받았고, 귀국해서는 여성단체를 조직해 여성해방 운동을 선도해 나갔다. 당시 봉건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던 일본사회로서는 큰 충격이었고, 그녀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 히라쓰카에게는 화가인 오쿠무라 히로부미(奥村博史)라는 연하의 애인이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여자가 자신보다 나이 적은 남자와 사귄다는 것이 아주 부도덕한 일로 여겨졌다. 이 일이 알려지자 그녀를 비난하는 사회적 여론이 높아졌고, 이에 따라 그녀가 이끄는 여성단체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쿠무라는 스스로 물러나기로 마음먹고 히라쓰카 앞으로 장문의 이별 편지를 썼다.


“백조들이 노니는 고요한 연못에 한 마리 제비가 날아들어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젊은 제비는 연못의 평화를 위해 떠납니다.”라고 이별의 편지를 보냈다. 


이 일로 일본에서는 여성의 젊은 애인을 “젊은 제비”라 부르게 되었고, 간단히 제비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여자들에게 붙어사는 “기둥서방” 등의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도 흘러들어와 여자를 등치는 젊은 남자를 제비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아마 지골로(gigolo)쯤 되는 되는 말일 것이다. 원조 “제비”는 애인의 앞날을 위해 스스로 떠났지만, 사이비 “제비”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여자를 등치는 것이 씁쓸하다. "제비"란 말이 나온 김에 내친 김에 제비의 반댓말은 무엇일까? 남자를 함정에 빠트려 넣고 돈을 뜯어내는 여자들을 "꽃뱀"이라 한다. 일본에서는 이 꽃뱀에 해당하는 말이 미인국(美人局)으로서, "쯔쯔모타세"라 읽는다.   


여하튼 제비란 말이 어감이 좋지 않다고 생각되던 차에 조훈현이 잉창치배 세계바둑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그에게는 “바둑황제”라는 별명이 새로이 붙었다. 이후, 조훈현을 일컬어 예전의 “조제비”라는 호칭은 점차 사라지고 매스컴에서도 점차 “바둑황제”라는 새 별명을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조훈현의 바둑은 날렵하고, 가볍고, 경쾌한 기풍이었지만, 후에 제자 이창호에게 밀리면서, 그의 기풍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조훈현도 나이가 들면서 바둑 전판에 걸쳐 긴장감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그의 바둑은 처절한 전투바둑으로 변하게 된다. 그의 기풍 변화에는 다른 요인도 있다. 과거 국내 기전에서는 다른 기사와의 현격한 실력차이로 가볍게 대세를 리드할 수 있었지만, 세계최강의 기사들과 대국이 빈번하게 된 국제바둑 시대에서는 과거와 같은 손쉬운 승리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여건의 변화에 따라 조훈현의 기풍은 치열한 “전투 바둑”으로 변모하였고, 이를 통해 그는 여러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세상은 전신(戰神)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선사하였다.  


조훈현은 한국바둑의 세계제패에 출발점이 된 인물이이며, 또 이후 거의 10년간을 세계 정상에 머물렀던 이창호를 키워낸 대기사이다. 그런만큼 조훈현은 한국 바둑사에 있어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이름일 것이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새누리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어 특히 박근혜 탄핵과정에서 여러가지 추한 모습을 보여주어 오점을 남긴 점은 아쉽다.    


(계속)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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