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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Nov 01. 2023

한국바둑의 도약과 사천왕: "일지매" 유창혁

반상(盤上)의 신삼국지(新三國志)-한중일 바둑쟁패전 其13

반상(盤上)의 신삼국지(新三國志) 其 12

유창혁 역시 어릴 때부터 독학으로 바둑을 수련하였다. 그러나 독학으로 바둑을 배웠다고 하지만, 그는 조훈현이나 서봉수에 비해서는 한 세대 아래여서, 서봉수의 독학과는 많이 다르다. 서봉수가 바둑을 익힐 시기에는 그야말로 우리나라 바둑의 황무지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변변한 교재는 물론 바둑을 제대로 둘 만한 상대도 찾기 어려웠다. 정말 소수의 아마추어 고수를 찾아 실전을 통해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그야말로 진흙탕 속에서 바둑을 배웠다. 


유창혁이 바둑을 배우는 시기인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반에는 우리나라도 이미 과거에 비해서는 여건이 현저히 좋아졌다. 수많은 바둑교재가 출판되었으며, 신문사가 주최하는 바둑 기전이 활성화되었고, 매스컴의 발달로 일본의 선진바둑의 동향과 기보가 즉시 국내로 전달되었다. 즉, 과거에는 교재도 없이 바둑을 독학하였지만, 이제 독학을 하더라도 본인만 노력한다면 교재는 어디서건 넘쳐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유창혁은 어릴 때부터 그 기재를 드러내 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그는 <학초배 아마추어 바둑대회>에서 우승하였는데, 이는 전국규모 아마추어 바둑대회에서 최연소 우승자로서 그 기록이 남아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아마추어 강자로서 전국을 휩쓸었으며, 일본에서 개최되는 세계아마추어 바둑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곧바로 프로의 관문을 통과하여 전문기사로 입문하였다. 


유창혁의 바둑 스타일은 삼국지의 조자룡을 연상시킨다. 그는 공격적인 두터운 바둑으로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또 용모가 깨끗하고 준수하여 <일지매>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의 바둑의 느낌은 한마디로 깨끗하다. 일반적으로 오랜 아마추어 강자의 경험을 가진 프로기사들은 대체로 끈적끈적하고 실리적인 기풍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그런데 대조적으로 유창혁의 바둑은 깔끔하다. 조훈현의 행마가 경쾌한 풋워크를 바탕으로 링 위를 춤추듯 다니면서 가벼운 잽을 툭툭 던지며 상대를 압도하는 스타일이라면, 유창혁은 상대의 앞길을 미리 차단하면서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는 스타일이다. 그러므로 유창혁의 바둑은 매우 화려하다. 그런 그에게는 "세계최고의 공격수"라는 별명이 붙었다. 


1970년대 후반 한국바둑은 조훈현의 독무대로서, 서봉수가 간간히 그의 앞을 막을 뿐 다른 기사들은 맥을 추지 못하였다. 1980년대 초 조훈현이 두 차례에 걸쳐 전관왕을 차지하는 등 전성기가 계속되는 동안, 조훈현의 아성을 무너트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찾기 시작하였다. 이때 등장한 기사들이 <도전 5강>이라 불리는 다섯 명의 기사로서, 강훈, 서능욱, 김수장, 장수영, 백성호였다. 이들은 당시 나이는 조훈현과 비슷하거나 조금 적은 정도였는데, 조훈현을 제외한 다른 기사들에게는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1980년대 초 바둑잡지인 <월간바둑> 지는 획기적인 이벤트를 마련했다. 조훈현과 도전 5강 간의 치수 고치기 10번 기 대국이다. 이미 국내 다른 기사들이 조훈현에게 호선으로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으므로, 먼저 도전 5강 쪽이 선으로 출발하여 한쪽이 2연승을 하면 치수를 한 점씩 고치는 것으로 하였다. 


프로기사들 간의 대국에서 호선과 선은 그야말로 천지 차이다. 대략 선은 호선에 비해 6-7집 정도 유리한 조건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서봉수는 프로에게 있어 “2집은 하늘이고, 3집은 끝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로 간의 대국에서 선으로 둔다는 것은 매우 유리한 조건이며, 그런 만큼 선으로 접히고 두는 기사로서는 대단히 치욕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조훈현과 도전 5강의 치수 고치기 대국에서 도전 5강은 참패를 하여, 선으로는 거의 지고, 2점으로는 겨우 이겨, 결국 조훈현과 도전 5강 간의 실력 차이는 선내지 두 점 정도의 차이라는 것으로 드러났다. 도전 5강으로서는 치욕적인 결과로써, 이후 도전 5강은 서서히 퇴조한다. 


도전 5강이 조훈현에게 패퇴하자 <월간바둑> 지는 도전 5강을 이을 새로운 세대를 발굴한다. 바로 신풍 3강으로서 유창혁, 양재호, 조대현이 바로 그들이다. 다시 조훈현과 신풍 3강 간의 치수 고치기 대국이 성사되어, 신풍 3인은 조훈현과의 치수 고치기 10번기에서 호선과 정선을 오락가락하며 거의 호각에 가까운 실력을 뽐냈다. 


이 대회에서 유창혁은 조훈현에게 정선으로만 두어 3전 전승, 조대현은 정선과 호선을 오가며 2승 1패, 양재호는 호선으로만 두게 되어 3패를 당했다. 이 시합에서 유창혁은 조훈현을 상대로 조금도 꿀리지 않고 당당히 싸워 승리한다. 비록 선으로 둔 바둑이긴 하지만, 그 당시 서봉수를 제외하고는 조훈현을 상대로 누구도 올리지 못했던 성적이었다. 


1980년대 중반 들어 유창혁은 조훈현의 왕국을 조금씩 허물기 시작한다. 대왕전 우승, 기성전 우승, 왕위전 우승 등으로 조금씩 영역을 넓혀 갈 무렵 이창호가 혜성같이 등장하며, 곧바로 한국 바둑은 이창호의 독무대가 되었다. 천하를 호령하였던 조훈현도 그가 키운 유일한 제자 이창호에게 모든 영토를 넘겨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도래한 이창호 왕국을 그래도 한 틈에서나마 잠식할 기사는 유창혁밖에 없었다. 1994년과 1995에는 전관왕의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던 이창호를 상대로 왕위전을 방어해 내면서 이창호의 전관왕을 좌절시켰다. 


이렇게 보면 1970말에서 1980년대 초에 걸친 조훈현-서봉수 관계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에 걸친 이창호-유창혁 관계가 비슷하게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국내 기전만을 놓고 본다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1990년대 이후는 바둑의 세계화가 급진전되는 시기로서 국내에서는 이창호의 독주시대가 계속되었지만, 세계라는 넓은 무대를 두고 유창혁, 이창호는 새로운 경쟁관계에 돌입하였던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는 불가피하게 국내무대라는 좁은 우물 안에서 이인자로 지내야 했던 서봉수의 아픔도 시대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는 생각이 들며, 그에 비하면 유창혁은 좀 더 좋은 시대적 환경을 만났다고 할 수도 있겠다.


유창혁은 1993년에는 일본이 주최하는 후지쯔배 세계바둑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처음으로 세계타이틀을 획득한다. 그리고 1996년에는 바둑 올림픽이라 하는 응창기배 세계바둑대회에서 우승하며, 2000년에는 삼성화재배와 춘란배, 그리고 2001년에는 LG배까지 우승함으로써 세계대회 그랜드슬럼을 달성하였다. 세계대회 그랜드슬럼이란 현존하는 메이저 세계대회를 모두 1번 이상씩 우승하는 것을 말하는데 조훈현에 이어서 사상 두 번째이다. 첫 번째 그랜드 슬럼을 달성한 조훈현은 1994년 후지쯔배를 우승함으로써 당시에 존재하던 응씨배, 후지쯔배, 동양증권배 3개 대회에 모두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랜드 슬럼의 질적인 면에서는 사실상 유창혁이 압도적이다. 조훈현이 그랜드 슬럼을 달성할 당시만 해도 세계대회는 3개에 지나지 않았지만, 유창혁이 그랜드 슬럼을 달성할 때는 세계대회가 5개나 되었기 때문이다. 유창혁은 세계대회에서 통산 6번 우승하였다.  


(계속)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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