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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Dec 10. 2023

일본바둑의 끝없는 추락

반상(盤上)의 신삼국지(新三國志)-한중일 바둑쟁패전 其17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일본바둑의 몰락은 정말 눈물겹다. 
 
일본의 바둑 인구는 1982년 1,130만 명이었으나, 2004년에는 450만 명, 2007년에는 240만 명으로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바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낮아지게 된 것이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어린 강자들이 속속 등장하여 세대교체가 빨리 진행되는데 비하여 일본은 조치훈 9단이 50세가 지나서까지 여전히 강자로 군림하고 있을 만큼 세대교체가 늦었다. 기계 전체가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상황이다. 
 
 조치훈과 고바야시 코이치(小林光一) 이후에도 일본 바둑계에는 젊은 강자들이 속속 등장하였는데, 그들은 그 이전의 고수들과 같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잠시 반짝하였다가 사라져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일본 국내에서는 절대강자라 평가받는 기사들도 국제무대에서 한국과 중국 기사들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깨갱하며 맥없이 깨지는 골목대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은 세대교체가 빠르게 이루어져 계속 신흥 강자가 출현하고 있는데 비해, 일본은 세대교체가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바둑이 이렇게 침체된 가장 큰 이유는 일본바둑이 더 이상 세계최강이 아니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바로 바둑의 세계화에 따른 결과라 할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응창기 배를 시작으로 국제바둑대회가 크게 늘어났다. 1990년대 후반에는 국제바둑대회가 매년 4-5회 이상 개최되게 되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는 매년 십여 개 이상의 크고 작은 국제 기전이 개최되었다. 이에 따라 바둑의 국제화가 급속히 확산되어 국경을 넘어 강자들 간의 대결이 일상화되고, 이에 따라 국가별로 기사들 간의 실력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바둑실력은 한국과 중국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국제대회에서 일본선수들이 한국과 중국선수들을 만나면 이기는 경우가 거의 없다. 국제기전의 참가선수는 보통 시드 조 선수와 예선통과 선수들로 나뉘는데, 시드는 국가별로 몇 장씩 배분한다. 예선은 참가자 제한 없이 개방적으로 운영되어 누구나 참가가 가능한데, 최근 10여 년간 일본선수들이 예선을 통과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세계 정상급 기사들이라 할지라도 국제대회에서 본선 시드를 받지 못하는 한 예선을 통과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국제대회에서는 예선이라 할지라도 쟁쟁한 선수들이 총출동하게 된다. 일본은 정상급 선수들이 여러 번 예선에 참가하였으나, 예선 1, 2회전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되풀이되자 2010년대 쯤에 들어서는 일본기사들은 젊은 신예기사 소수가 국제대회 예선에 참가할 뿐 정상급 선수들은 아예 참가를 않고 있다. 아무리 일본 국내에서는 적수가 없는 최강자라 하더라도 국제대회 예선을 통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여 더이상 망신 당하기 전에 아예 시합에 출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마 국가시드가 없이 예선만으로 본선 참가선수들을 선발한다면, 본선참가선수는 한국과 중국선수들로만 차게 되고, 일본선수들은 구경할 수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2010년대 이후에는 실력으로 세계 랭킹 30위 선수를 선발한다면, 일본선수는 글쎄 1명이나 끼이려나? 2000년대 이후 일본 최강의 기사는 이야마 유타(井山裕太) 9단이다. 그는 일본의 바둑역사를 새로이 쓴 기사이다. 2010년 무렵 그는 십단(十段) 타이틀을 획득함으로써 일본 국내 기전 7대 타이틀을 석권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는 일본 바둑역사상 최초의 사건이다. 7대 타이틀이란 기성(棋聖), 명인, 본인방의 3개 메이저 타이틀에다 십단(十段), 왕좌(王座), 천원(天元), 기성(碁聖)의 4개 타이틀을 합한 것을 말한다. 
 
 이 7관왕이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지금까지 조치훈이 대삼관(기성, 명인, 본인방)을 포함하여 왕좌까지 차지하여 4대 타이틀을 차지한 바 있다. 조치훈이 대삼관을 달성하였을 때, 일본바둑을 통일한 초유의 일이라고 하여 몇 날 며칠 동안을 신문과 방송에서 대서특필하였다. 절대강자의 출현이라는 일본 바둑의 신기원을 연 것이다. 


그런데 이야마 유타는 조치훈을 훨씬 뛰어넘어 7대 타이틀 전부를 싹쓸이한 것이다. 일본에서 현대바둑이 시작된 이후 오청원, 사카다, 조치훈, 고바야시 등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수많은 천재기사들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이야마 유타가 이루어낸 것이다. 그러한 이야마 유타 조차 한국이나 중국 기사들을 만나면 깨갱하고 꼬리를 말아버린다. 한국이나 중국의 어린 기사들 조차 일본 최정상급 기사들을 완전히 하수(下手) 취급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야마 유타가 7관왕에 등극하던 날 필자는 마침 출장으로 일본에 가 있었다. 7관왕 등극에 관한 기사가 신문 한 모퉁이에 간간이 눈에 띄고, TV 뉴스에서도 그 내용이 간략히 흘러나왔다. 의외로 언론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한 이삼십 년 전이라면 이 정도 뉴스라면 아마 도하 각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TV에서도 몇 날 며칠 동안 난리가 났을 것이다. 
 
20년 전쯤 일본 프로 장기(將棋)에서 하부 요시하루(羽生善治) 9단이 7관왕을 달성하였을 때 온 매스컴이 거의 몇 주간에 걸쳐 떠들썩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스포츠 신문은 하부 요시하루의 기사로 거의 도배를 하다시피 하였다. 장기보다는 바둑이 훨씬 더 인기가 있다는 점에서 그 시대에 만약 바둑계에서 7관왕이 탄생하였다면 일본 온 나라가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은 바둑보다는 오히려 장기가 더 인기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야마 유타의 7관왕은 왜 그다지 기사거리가 되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비록 일본에서 7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하였지만, 이야마 유타가 세계최강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누구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에 와서 일본의 바둑 타이틀전은 어차피 2부 리그, 즉 마이너 리그에 불과하다. 바둑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이야마 유타가 일본 타이틀을 석권했다지만 어차피 “우물 안 개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마 유타 정도의 기사는 한국과 중국에는 널리고 널렸고, 만약 그가 한국에나 중국에 오게 된다면 2진급 기사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의 3대 타이틀전은 메이저급 세계대회에 비해 우승 상금이 더 많다. 2부 리그 선수가 팬들의 외면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각고의 노력을 하여 2부 리그에서 우승을 하였다면 팬들은 그의 노력과 의지에 감동과 성원, 그리고 아낌없이 격려의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그렇지만 메이저 리그와 격리된 상황에서 메이저 리그보다 훨씬 많은 상금이 걸린 마이너 리그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갈채를 보낼 언론이나 팬은 없다. 우물 안 개구리에 대한 멸시와 조롱이 있을 뿐이다. 

 
일본 현대바둑 100년의 역사에서 어떤 바둑천재도 이룩하지 못한 7관왕이라는 그 찬란한 위업이 이렇게 팬들의 무관심과 조롱 속에서 묻혀져 버린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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