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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Sep 13. 2023

세계바둑의 중심지 일본

반상(盤上)의 신삼국지(新三國志)-한중일 바둑 쟁패전 其2

까마득한 옛날 중국에서 생겨난 바둑은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17세기 초 일본에서는 근대적인 전문기사 체제가 확립되고, 바둑행정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바둑은 일본에서 그 찬란한 꽃을 피웠다. 바둑 수준이나 저변, 바둑에 대한 사회적 관심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은 우리나라나 중국을 압도하였던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로 우리나라 프로기사나 애기가들에게 있어 일본의 프로기사는 구름 위의 고수로 비쳤다. 1970년대 초반 경 그저 그렇고 그런 일본의 중견급 프로기사가 한국에 왔었는데, 신문사에서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기사들과의 대전을 주선하고 TV에서는 이 대국을 생중계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당시 TV로 중계된 대국에서 지금은 타계한 정창현 5단이 그를 이겨, 신문에 이 대국이 대서특필되는 소동이 있었다. 그만큼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 바둑은 우리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일본에 실질적인 프로 기사가 정착된 이후 400년 이상에 걸쳐 수많은 천재기사들이 등장하였다. 초대 본인방인 닛카이(日海) 혼인보 산샤(本因坊 算砂)를 비롯하여 “실력 13단”이라는 평가를 얻은 혼인보 도사쿠(本因坊道策), 어성기御城碁, 오시로고) 19연승을 자랑하는 불패 신화의 혼인보 슈사쿠(本因坊秀策), 권모술수의 대가였지만 도사쿠와 함께 기성(棋聖)으로 불렸던 혼인보 죠와(本因坊丈和), 죠와 와의 어성기 대국에서 패배하여 피를 토하고 죽은 토혈지국(吐血之局)의 비운의 젊은 천재 세키세이 인테츠(赤星因徹) 등의 이야기는 신화가 되어 전해 내려왔고, 그들이 벌인 용쟁호투의 대결은 기보(棋譜)로서 길이 전해졌다. 여기서 어성기御城碁, 오시로고)는 에도성 쇼군 앞에서 두는 바둑을 말한다. 우리로 치면 대궐의 어전(御前)에서 두는 바둑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여기서 잠깐, 혼인보 도사쿠가 “실력 13단”이라 한다면 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이었을까? 지금은 프로기사 중에서 제일 많은 단위가 9단이지만, 에도 시대의 일본의 단위 제도에서는 9단은 명인(名人) 단 1명만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단위가 2단 차이가 날 때마다 1점씩 더 놓게 된다. 그러므로 13단이란 9단, 즉 당대의 일본 최고고수를 3점 접어주는 실력이라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야 아무리 도사쿠가 강하다 하더라도 최고수급 기사를 3점 접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지만, 그 정도로 도사쿠의 실력이 강하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슈사쿠의 실력에 대해서도 이런 일화가 있다. 거의 10년에 걸쳐 세계바둑을 제패하였던 우리나라의 이창호는 슈사쿠의 기보를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그는 “나는 평생을 다 바쳐도 도저히 슈사쿠 선생에는 미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본다면야 슈사쿠가 살아있을 때보다 바둑이 크게 발전하였으므로 직접 대국을 벌인다면 아무래도 이창호가 슈사쿠보다는 훨씬 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호가 그렇게 평가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슈사쿠의 바둑이 뛰어났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이창호라는 기사가 원래 워낙 겸손한 성격이라 자신을 낮추고 슈사쿠를 높이 올려준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창호가 그렇게 까지 격찬한 인물은 슈사쿠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얼마 전에 우연히 본 이세돌의 인터뷰가 재미있다. 진행자가 이세돌에게 옛날 일본의 고수들과 이세돌의 실력차이, 그리고 몇십 년 전의 일본바둑의 고수들과 이세돌의 실력차이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러자 이세돌의 대답은 그동안 바둑이 놀랄 정도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절대적인 실력만을 비교한다면 옛날의 고수들은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프로 정상급에는 미칠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환경의 변화로 인해 전반적으로 현대 바둑의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절대적인 실력만으로 옛 고수들의 실력을 폄하해서는 안된다라고 대답하였다. 정말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옛날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무적의 마케도니아 군과 현대의 기갑사단이 정면대결을 벌이면 누가 이길 것이냐라고 묻는 것과 같은 우문일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일본의 바둑은 더욱 화려하게 꽃 피웠다. “영원한 기성(棋聖)”이라 불리는 오청원(呉清源)을 비롯하여 기타니 미노루(木谷実),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郎) 등이 강자가 줄을 이어 등장하였다. 특히 하시모토 우타로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던 날 히로시마 교외에서 이와모토 카오루(岩本薫)와 “원폭하의 대국”(原爆下の対局)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 대국은 원폭 투하된 후 잠시 중단되었으나 2시간 정도가 지난 10시 30분경 다시 속개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뒤를 이어 “면도날”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카다 에이오(坂田栄男)가 각종 기전의 타이틀을 휩쓸기 시작했으며, 사카다의 시대가 절정을 구가하고 있을 때 대만 출신의 임해봉(林海峰, 린하이펑)이 그를 막아섰다. 임해봉의 전성시대가 시작되는가 했더니, 바둑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모양 나쁜 수는 절대로 두지 않는다는 “미학”(美學) 오다케 히데오(大竹英雄)가 등장하였다. 그러더니 곧바로 뒤를 이어 “기타니 도장의 세 마리의 새”(木谷三羽烏)라고 불리는 "컴퓨터"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 "살인청부업자" 가토 마사오(加藤正夫), "우주류"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라는 세 젊은 고수들이 등장하였다. 


이런 일본의 바둑 수준에 비한다면 우리나라는 너무나 초라하였다. 이 당시 우리나라 프로기사들은 물론 아마추어 고수들도 공부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일본에서 출판된 다양한 바둑책을 교재로 공부를 하였으며, <임해봉 전집>, <사카다 전집> 등 일본의 일류기사들의 기보와 해설을 수록한 책들을 통해 고수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일본의 일류기사들이란 하늘이었으며, 전설이었다. 


바둑 고수들은 모두 일본에 있는 상황에서 일본바둑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일본기원에서는 외국의 바둑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청원이나 임해봉, 그리고 조훈현이나 조치훈 등의 예에서 보듯이 외국에서 기재가 있는 사람들을 데려와 교육을 시켜 좋은 기사로 키워내었지만, 이는 일본바둑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지, 이를 통하여 한국이나 중국의 바둑을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는 거의 없었다. 일본과 다른 나라의 바둑 수준의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신경을 쓸 필요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할 이유도 찾지 못하였다.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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