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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Feb 23. 2024

신진서 농심배 세계바둑대회 6연승 우승을 보며

한 명의 천재의 위업

세계 바둑에 있어서 200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이창호, 조훈현, 유창혁 등 세계 최정상급 기사들이 세계 바둑을 호령했으며, 여러 명의 어린 선수들까지 앞다투어 세계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세계 최정상급의 선수는 물론 그 바로 아래 단계의 선수층도 한국이 압도적으로 두터웠다. 그러나 세계바둑에 있어 한국의 이러한 압도적인 지위는 200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변화된다.


중국에서 바둑의 인기가 높아지고 기사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높아지면서 많은 뛰어난 소년들이 바둑의 세계로 뛰어들어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바둑실력은 일취월장하였고 그 저변도 획기적으로 넓어졌다. 한국에서는 이창호를 이은 또 다른 천재 이세돌이 등장하서 여전히 세계바둑을 석권했으나, 그를 제외한 전반적인 바둑실력은 중국이 한국을 압도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은 이세돌이라는 한 명의 천재기사에 의해 여전히 세계바둑의 패권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2010대 초중반이 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이세돌이 중국의 새로운 천재 커제에게 압도당하면서 한국은 세계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커제가 세계 일인자가 되어 세계바둑을 호령했으며, 두터운 선수층이 그 뒤를 받혔다. 중국 랭킹 10위권 선수가 세계대회 우승을 한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막강한 전력을 갖게 된 것이다. 


이세돌의 뒤를 이은 새로운 천재 박정환이 홀로 중국 바둑의 독주를 막으려 하였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박정환은 유일하게 세계 1위 커제와 5:5의 대등한 전력을 보였다. 그렇지만 중국 랭킹 10위권 선수와는 6:4, 20위권 정도 선수와는 7:3 정도의 우위를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터운 중국 선수층을 모두 뚫고 우승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반면 중국은 커제가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우승을 휩쓸었으며, 커제가 탈락한다 하더라도 생각지도 않은 다른 선수가 나타나 우승컵을 거머쥐는 것이다. 박정환은 그동안 세계바둑대회에서 5회 우승하였다. 만약 박정환이 없었더라면 세계바둑대회는 중국 기사들의 잔치판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두꺼운 선수층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중국랭킹 30위 기사가 한국에 온다면 한국랭킹 5위 기사와 거의 대등하게 싸울 것이다. 일본에 간다면 아마 일본 랭킹 1위에게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중국 바둑은 강하고 또 그 층이 두텁다.


그러나 2020년 무렵이 되면서 이러한 세계바둑의 판도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신진서라는 새로운 바둑 천재가 등장한 것이다. 바둑천재라는 말을 들었지만 커제에게는 맥을 쓰지 못하던 신진서가 2020년 무렵부터 커제를 압도하기 시작하더니 2년 전 무렵부터는 2위권 선수를 압도적인 격차로 따돌리면서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세계 랭킹 상위권을 중국 기사들이 석권하고 있는 가운데 신진서만이 다른 기사들의 추격을 허용하지 않으며 세계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농심신라면 세계바둑대회에서 신진서가 5명의 중국 톱클래스 선수를 비롯한 6명의 선수들을 물리치고 한국에 우승컵을 들고 왔다. 이 대회는 한중일 국가대항 바둑대회로서 국가별로 5명의 대표선수가 출전하여 승발전으로 시합이 이루어진다. 승발전이란 시합에서 이긴 선수가 다른 국가의 대표와 계속 싸워나가 최종적으로 선수가 남는 국가가  우승하는 방식이다. 


이번 대회에서 중국의 1번 타자로 나온 중국의 셰얼하오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였다. 혼자서 4명의 일본 선수와 3명의 한국선수를 제압, 7연승을 기록하면서 한국과 일본을 막판으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한국은 한 명이 일본선수에게 지고, 나머지 세명은 셰얼하오의 제물이 되었다. 중국은 한 명의 손실도 없는 대신, 한국과 일본은 1명씩의 선수만 남았다. 아무리 천하의 신진서라는 하지만 이 6명의 선수를 모두 물리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였다. 신진서가 막강하긴 하지만, 이들 최상위급 선수들과는 7:3 정도 이상의 우위를 보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마지막 선수로 등장한 신진서는 7연승의 셰얼하오를 제압하였다. 이어서 일본의 마지막 선수 이야마 유타를 간단히 물리쳤다. 이제 신진서를 기다리고 있는 선수는 충국의 최정상급 4인의 선수. 그러나 여전히 혼자서 이 모두를 쓰러트린다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신진서는 역시 신진서였다. 중국의 두 번째 선수 자오천위를 무난히 물리쳤다. 다음으로 나온 선수는 신진서에게 세계 일인자 자리를 뺏긴 커제. 그는 힘 한번 못쓰고 신진서에게 패퇴하였다. 다음으로 나온 선수는 현재 중국랭킹 2위 딩하오, 그 역시 신진서의 맹공에 쫓기다가 끽소리 한번 못하고 주저앉았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선수는 현 중국랭킹 1위 구쯔하오. 신진서는 작년 란커배 세계바둑대회 결승에서 그에게 1승 후 2연패의 뼈아픈 역전패로 우승컵을 놓친 바 있다. 이번에는 신진서는 초반부터 압도적인 전력으로 우세를 차지해 갔다. 신진서의 승리가 확실시된다는 시점에서 신진서의 실수가 나왔고 전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신진서는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순간 구쯔하오의 실수를 틈타 기사회생하였고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로서 우승컵은 다시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중국은 세계바둑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면서도 오직 한 명의 한국의 천재기사에 의해 세계제패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5명의 최상위급 선수 모두가 신진서의 칼날의 제물이 되었다. 중국으로서는 참으로 뼈아픈 상황일 것이다.


중국은 이번 시합에서 선봉장 셰얼하오가 7연승을 하자 자신들의 우승을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그래도 신진서가 남아있으니까" 생각하며 일말의 불안감을 떨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설마 설마 하는 일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자 그 불안감은 더욱 커졌고, 아마 오늘의 최종시합을 앞두고는 공포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싸움에서 패하자, 그야말로 망연자실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맛보았을 것이다. 


중국의 그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단 한 명의 한국인 천재 기사에 의해 무릎을 꿇는 비장한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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