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7 화) 서유럽 렌터카 여행(25)
세찬 빗소리에 잠이 깼다. 폭우가 내리 퍼붓는다. 오늘은 하루종일 베네치아를 관광할 계획이었는데, 이래서야 밖으로 나가기 어렵다. 오후까지 기다려보다가 그때까지 비가 개이지 않는다면 할 수 없이 빗속 관광을 할 수밖에 없다. 베니스는 아름다운 물의 도시이다. 곤돌라를 탄 관광객들이 수로를 따라 여유 있게 도시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나도 꼭 한 번 찾고 싶었다. 그런데 비 때문에 이렇게 방에 갇혀있다.
베니스는 영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대개는 몇 장면에 그치지만, 그중에는 이야기 전체가 베니스를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영회도 있다. 여행출발 전에 캐서린 햅번이 여주인공 제인 역을 맡은 <여정>(Summertime)이란 제목의 영화를 감상하였다. 미국에서 비서로 일하는 제인이라는 여성이 베니스로 휴가를 와 베니스의 풍경에 취하고 사랑에 취한다는 이야기이다. 나도 그 제인이 빠져들었던 베니스의 풍경에 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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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 틀어박혀 있기보다는 이 시간에 빨래나 해야겠다. 마침 이 리조트 안에 빨래방이 있어 잘 됐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한 번도 빨래방을 이용해 본 적이 없어 잘 될지 모르겠다. 빨래방에 가서 설명서를 읽어보았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른 손님이 들어오면 물어보겠는데, 오늘 비가 오는 탓인지 손님이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리셉션을 찾아가 물으니, 돈을 지불하고 가면 스탭을 보내겠다고 한다. 빨래방에 돌아가 잠시 기다리니 곧 직원이 와서 대신해 준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직원이 돌아가고 난 뒤 손님이 여러 명 찾아왔는데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빨래하는데 실패한다. 결국 모두틀 직원의 도움을 받아 빨래를 했다. 내가 기계를 제대로 못 다룬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된 듯하여 흐뭇하다. 이래서야 코인 빨래방이라는 이름이 퇴색될 수밖에 없다. 빨래를 마칠 때쯤 비가 개인다. 이곳에서 올드타운까지 가는 셔틀버스가 있다고 한다. 차를 운전해서 가는 것보다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셔틀버스는 오후 4시에 출발했다. 셔틀버스를 내린 후 15분쯤 걸으니 올드타운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 들어서니 일순 시간이 수백 년 전 르네상스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정경이 펼쳐진다. 베니스는 깊숙한 만을 끼고 형성된 도시이다. 올드타운에 들어서자마자 수상버스 터미널, 수상택시 선착장들이 보인다. 작은 섬이 보이고 섬으로 연결되는 보행교도 있다. 섬에도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있다. 섬에는 나중에 가기로 하고 사람들이 많이 가는 쪽으로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큰 다리가 나오고 다리 건너편에 돔형 지붕을 가진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은 산 시메 오니 피콜로 성당(San Simeone Piccolo)이라 한다. 이 성당의 유래를 알기 위해 챗GPT에게 물었더니, 베니스에는 그런 성당이 없다고 빡빡 우긴다. 잘 알지도 못하는 넘이 고집은 되게 세다. 산 시메오니 피콜로 성당은 베네치아의 대표적 명소 가운데 하나로서 18세기 초반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지붕 위에는 거대한 청동 돔이 있는데, 로마의 판테온을 모델로 한 것이라 한다. 독일의 성당은 대부분 뾰족뾰족한 느낌이었는데, 이태리의 성당은 정면이 마치 사각형 디자인처럼 보인다.
좀 더 가니 흰색의 아름다운 건물이 나온다. 산타 마리아 디 나사렛 성당(Santa Maria di Nazareth)이라 하는데, 18세기 초에 완성되었다 한다. 이곳의 성당은 크기는 독일의 성당들에 비해 작지만, 아름다운 조각과 정교한 장식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다. 걸어갈수록 아름다운 옛 건물이 계속 나온다. 구글 렌즈로 건물의 이름을 확인하기 바쁘다.
베니스의 대표적 명소는 산 마르코 광장과 산 마르코 성당이다. 지도를 획인하니 1킬로쯤 더 가야 한다고 나온다. 여기니부터 본격적인 좁은 골목길이 시작된다. 구글 지도를 손에 들고 미로와 같은 골목길을 찾아나간다. 하도 골목길이 꼬불꼬불해 방향을 알 수가 없다. 가는 길에는 좁은 수로가 수시로 나오고 그럴 때마다 작은 다리를 건넌다. 좁은 수로에 들어오니 비로소 곤돌라도 많이 보인다.
이렇게 한참을 가니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이 나오고, 광장 한쪽에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이 서있다. 그리고 성당과 연이어 아름다운 건물이 있는데, 두칼레 궁전이라 한다. 산 마르코 광장은 9세기 초반에 처음 조성되었고 이후 확장되었다고 하며,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걸쳐 베네치아 공화국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산 마르코 대성당은 11세기 후반에 완공되었는데, 베네치아를 수호하고 있다는 성인 성 마르코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성당의 외부는 화려한 대리석 조각으로, 내부는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황금빛의 돔과 벽화로 인해 “황금의 성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성당은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에 소속된 것이었다고 한다. 두칼레 궁전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통치자였던 도제의 거주지이자, 집무실이었다고 한다.
어제 베로나에 갔을 때는 좁은 골목 안에 명품 샵이 즐비했다. 그에 비해 이곳에서는 명품 샵은 못 보고 비교적 값싼 기념품 가게가 많았다. 그런데 산 마리노 광장을 지나 인근골목에는 명품 샵이 모여있었다. 내가 아는 브랜드는 거의 다 모여 있는 것 같다. 앞에서 소개한 영화 여정에서는 주인공 제인이 바로 이 산 마리노 광장에서 사랑을 찾는다. 영화에서 본 바로 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나 제인이 시진을 찍다 물에 빠지는 운하는 찾지 못했다.
베네치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무대가 되는 도시이다. 어제 베로나에 갔을 때는 비록 로미오와 줄리엣이 픽션이라 할지라도 줄리엣의 집 등 관련 명소가 있었다. 베네치아에도 <베니스의 상인>에 관한 관광지가 없을까 검색해 보았으나, 없는 것 같았다.
산마리노 광장을 지나 좀 더 깊숙한 곳까지 갔다. 미로 같은 골목 어디를 들어가더라도 아담한 고풍스러운 풍경이다. 수로의 폭이 5미터도 안 되는 곳도 많다. 거의 두 시간 이상을 걸었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나올 때 휴대폰 보조 배터리를 들고 나오는 걸 잊었다. 핸드폰 배터리가 간당간당한다. 미로와 같은 이곳에서 구글맵 없이 길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여긴 차는 일체 못 들어오기 때문에 택시를 부를 수도 없다. 그냥 미아가 될 수밖에 없다. 등에 진땀이 난다. 하도 많이 걸어 집사람은 거의 탈진상태이다.
호텔로 돌아오니 밤 10시 가까이 되었다. 길을 찾아오느라 마음에 여유가 없어 아직 저녁도 못 먹었다. 가져온 즉석 육개장 한 봉지에 햇반 하나를 말아먹으니 꿀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