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8 토) 서유럽 렌터카 여행(42)
오늘은 유럽 최고의 협곡이라 불려지는 '고르즈 뒤 베르동'(Gorge du Verdon)으로 간다. 조금 더 프랑스식 발음으로 하자면 "고흑즈 뒤 베흑동" 쯤으로 되려나. 이 협곡은 베르동 강에 의해 형성되었다. 숙소를 떠나면서 이곳의 높이를 확인했더니 해발 650미터쯤 된다. 내비를 고르즈 뒤 베르동을 맞추니까 약 50킬로, 1시간 20분이 걸리는 것으로 나온다. 내 운전 실력이면 2시간 정도로 잡아야 한다.
출발하자마자 산간 도로가 시작된다. 왼쪽은 계류이고 오른쪽은 높은 산이다. 계곡에는 옥색의 맑은 물이 철철 넘치도록 흐른다. 어제 본 아래쪽의 계류는 진한 잿빛이었는데, 이곳 상류는 어째서인지 아주 맑은 물이다. 투명하다고 할 정도의 옥색이다. 계곡 양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다. 도로는 계곡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한없이 계속된다. 바위를 깎아 아치형으로 된 바위 밑을 지나기도 한다. 적당한 곳에 차를 멈춰 경치를 감상하고 싶은데 차를 세울 곳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차를 세울 것이 보여도 이미 다른 차들이 차지하여 빈자리가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 뒤로 바짝 붙어 차들이 따라오기 때문에 여유를 갖고 속도를 늦춰 차를 세울만한 곳을 찾기도 어렵다. "추월하고 싶으면 추월하라, 난 내 페이스로 간다."라고 마음먹으면 되겠지만, 매번 뒤에 차가 바짝 붙으니 그러기도 힘들다. 가끔 넓고 시야가 트인 곳이 나오면 길 옆에 붙어 자리를 내어주는데, 그러면 20~30대의 차들이 한꺼번에 나를 추월해 간다. 이곳의 제한속도는 70킬로가 많은데, 나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50킬로 이상은 힘들다.
산길을 오를수록 계곡은 점점 더 도로 아래쪽으로 멀어진다. 옆의 산들은 대부분 바위산들이다. 계곡류도 깊지만 양 옆의 바위산들도 올려다 쳐다보면 고개가 아플 정도로 높다. 산 위쪽으로 갈수록 다니는 차도 줄어들어 좀 여유를 갖고 경치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경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장엄하다", "웅장하다", "아름답다", "장관이다" 등등 무슨 말로 표현해도 조금은 부족한 것 같다. 이 모든 표현을 한데 모아놓으면 고르즈 뒤 베르동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말이 될 것 같다.
차는 점점 산 정상 쪽으로 오른다. 그럴수록 계곡과는 멀어진다. 전망대가 나올 때마다 내려서 경치를 보면 계류는 까마득한 아래쪽으로 흐른다. 정상 근처의 전망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협곡 아래쪽 계류까지의 깊이는 약 700미터 정도라고 한다. 옆에서 오랜만에 한국말이 들린다. 돌아보니 4명의 중년 남녀인 한국인 관광객으로서, 형제 부부가 함께 관광을 왔다고 한다. 그들에 따르면 요즘 TV에서는 프랑스 남부 여행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면서, 얼마 전 한가인이 이곳에 와서 촬영한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고 한다. 최근 몇 년 간 TV를 거의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그런가 하고 생각했다.
드디어 내비에 '고르즈 뒤 베르동'이라 찍은 곳에 도착했다. 도로의 정점이다. 높이를 확인하니 해발 1,300미터가 넘는다. 도로 옆에는 넓은 전망대가 있다. 나는 이곳에 오면서 서너 시간 동안 트레킹을 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은 트레킹을 하면서 직접 산과 계곡을 체험하기보다는 경치를 감상하는 곳이다. 물론 직접 체험을 즐기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까마득한 절벽에서 록 클라이밍을 하는 사람도 있고, 드문드문 산을 오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경치 감상이다.
이들 외에 다른 부류가 있으니 바로 바이크족들이다. 바퀴 크기가 좀 과장하자면 자동차 바퀴만 한 오토바이를 타고 구부러진 산길을 곡예하듯 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자전거족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이 가파른 산간도로를 오르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단체로 떼를 지어 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많아야 네댓 명 정도의 친구들이 함께 달리며,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연인이나 부부로 보이는 남녀 한쌍이었다. 이렇게 높은 산간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오르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글맵에서는 숙소에서 고르즈 뒤 베르동까지 1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고 나왔으나, 나는 3시간이 걸려 왔다. 그래도 원래 서너 시간 정도 트레킹을 하려던 것을 안 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시간을 벌었다. 느긋이 오늘의 숙박지인 마르세유로 가자.
산 정상을 지나니 이제 내리막 도로가 계속된다. 산 이쪽 면으로도 아래쪽으로 여전히 계류가 흐르지만, 산을 오를 때 보았던 계류에 비해서는 아름다움이 덜한 느낌이다. 게다가 도로를 올라오면서 입에서 저절로 감탄의 소리가 나오는 그런 곳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이제 이곳 경치에 익숙해져서 계류를 보더라도 좀 덤덤한 느낌이 들었다.
도로를 조금 내려오다 보니 저 아래쪽에 넓은 호수가 보인다. 레이크 생트-크로아(Lac de Sainte-Croix)로서, 베르동 강을 댐으로 막아 만든 인공호수로서, 면적은 22평방 킬로미터, 최고 깊이는 93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청호가 70평방 킬로미터가 조금 넘으니, 대청호의 거의 1/3 정도의 면적이다. 이 호수는 해발 거의 500미터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높이를 고려한다면 정말 엄청난 크기의 인공호수이다. 호수의 주변 공간은 아름답기 그지없고, 카약, 패들 보트 등의 놀거리를 즐기는 사람들도 보인다.
호숫가에 차를 세우고 잠시 걸었다. 호수 옆으로 좋은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빈틈없이 주차되어 있으나 호수가 워낙 넓어 주차장에서 조금만 멀어지더라도 사람들은 아주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