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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Sep 01. 2024

통계인의 밤에서 만난 OB들

나는 만 42년 반을 봉급생활자로 직장생활을 했다. 이 말을 듣는 젊은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일 것이다. "아니, 그렇게 오래 직장생활을 하다니.. 무슨 그런 행운?" 다른 하나는 "질리지도 않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미련하게... “


그 오랜 기간을 직장생활을 하면서 거친 직장은 단 두 곳이다. KDI와 통계청. KDI에서 40년을 일하면서, 도중에 잠시 휴직하고 통계청에서 어공으로 딱 2년간 일했다. 그런데 KDI에는 그렇게 오래 다녔으면서도 친한 사람이 거의 없다. 친한 사람이라 해봤자 다섯 손가락도 채 안된다. 그동안 거쳐갔던 수많은 사람들, 어쩌다 우연히  만나봐야 그저 건성으로 인사만 나누는 데면데면한 관계이다. 그런데 통계청에서는 2년 간만 다녔지만, 지금도 만나면 반갑다고 서로 얼싸안는 사람이 적지 않다. KDI의 인간관계는 건조한 느낌이지만, 통계청은 뭐랄까 좀 촉촉한 느낌이다.


9월 1일은 통계의 날이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로 오늘 대전에서 통계인의 밤 행사가 열렸다. 통계청에서 통계청 출신 OB들을 초청하여 선후배 간 친목을 도모하는 행사이다. 처음에는 이미 15년 전에 단 2년 동안 근무한 적 밖에 없는 통계청이길래, 참석이 좀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옛날 그리운 얼굴들을 한번 보자는 생각으로 참석하였다.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만났다. 대부분 은퇴하였기 때문에 모두들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보통 경제부처의 경우 간부들이 은퇴하면 낙하산 인사로 관련기관에 재취업하여 좋은 대우를 받는다. 이에 비해 통계청에는 그런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전문성을 살려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은퇴생활로 들어간다.

행사가 시작되니 곧 대형화면에 들꽃이 가득 핀 들판에서 하모니카를 부는 사람의 동영상이 보인다. 어딘가 낯익은 모습인데, 알고 보니 소속은 달랐지만 함께 근무했던 사람이다. 은퇴하면서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하모니카를 시작했다고 한다. 아주 수준급 연주이다. 화면 가득한 들꽃들이 하모니카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춘다.  


통계청 OB 모임인 통계동우회의 최봉호 회장은 은퇴하면서 마술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통계청 국제과장을 거쳐 동북지방통계청장을 역임하였다. 대구 경북 및 강원도 통계조직을 총괄하는 자리이다. 그는 요즘 마술을 배워 소외계층을 찾아가 마술공연을 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페이스북을 통해 그의 마술 활동을 가끔씩 접했다. 그가 그동안 익혀왔던 비장의 마술을 시전 한다. 좀 어설프지만 그래서 더욱 재미있다.

옆에 앉아있던 오병태 (전) 사회통계국장이 갑자기 무대로 뛰어 올라간다. 내가 모르는 트로트 노래를 부르는데 깜짝 놀랐다. 웬만한 가수보다 훨씬 낫다. 두 곡을 뽑고 내려온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노래를 잘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명함을 내주는데, 트로트가수 협회 회원이자 고문이라 한다. 나도 노래를 무척 좋아하지만, 소질이 안돼 엄두를 못 내는 터라 부럽기 짝이 없다.  


오늘 만난 사람들 대개가 나이 70 전후이다. 모두가 각자 노후 생활을 충실히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얼굴에 고생 흔적이 있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거의 15년 만에 만나는데도 불구하고, 얼굴도 옛날 그대로이다. 나만 나이를 먹은 것 같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한 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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