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8) 치악산과 제천 의림지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내린다. 어제저녁 과식한 탓인지 식욕이 전혀 없다. 2박 3일의 여행을 끝내고 오늘 귀가하여야 하므로 짐을 싸야 한다. 돌아가는 길에 치악산과 제천 의림지를 거쳐가기로 하였다. 아침은 건너뛰고 적당한 식당이 나오면 먹기로 하였다. 이 좋은 휴양림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기회가 있으면 또 찾도록 하여야겠다.
치악산에는 두 개의 유명한 사찰이 있다. 바로 구룡사와 상원사가 그것이다. 작년 가을 여행에서 구룡사를 다녀왔으니 이번에는 상원사를 찾기로 하였다. 상원사는 “나그네를 구한 까치” 일화가 서려있는 절이다. 내비가 인도하는 대로 치악산 국립공원 지역에 들어가 조금 더 가니 작은 주차장이 나오고, 상원사 가는 길 표지가 나온다. 여기에 주차를 하고 걸어 들어갈까 생각했으나, 비가 세차게 내려 차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는 게 좋다고 생각되어 표지판을 따라 좁은 길로 올라갔다. 포장이 된 좁은 길인데, 오는 차와 마주치면 조금 성가신 그런 길이다.
올라갈수록 길은 점점 좁아진다. 이제 마주오는 차가 있으면 꼼짝없이 뒤로 몇백 미터나 후진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길이다. 그런데 한참을 운전해 들어갔는데도 아무런 표지가 없다. 그리고 드디어 포장도로가 끝나고 비포장 산길이 나온다. 차가 들어갈 수는 있지만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다. 어떤 표지도 보이지 않아 이 길이 상원사 가는 길이 맞는지 점점 불안해지고 있는 터에 상원사까지 4킬로라는 작은 표지판이 나온다. 포장 안된 이 좁은 산길을 앞으로 4킬로나 더 운전해서 들어가야 한다고? 만약 마주오는 차가 있으면 어떡하나? 비가 이렇게 세차게 내리는데 괜찮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니 오늘은 여기서 그만 돌아가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차를 돌릴 적당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없이 계속 산길을 올라가다 보니까 차를 겨우 돌릴 수 있는 좁은 공간이 나온다. 결국 상원사는 가보지 못하고 중간에서 차를 돌려 나왔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산 아래에서부터 걸어서 가보도록 하여야겠다. 제천으로 향하는 길에 길 옆에 식당이 보인다. 모녀가 운영하는 작은 식당인데, 홀에서 서빙을 하는 딸이 아주 싹싹하여 기분 좋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제천에 있는 의림지는 김제 벽골제와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이다. 삼한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니 축조된 지 거의 2,000년 가까이 되는 것 같다. 벽골제와 수산제는 이미 저수지로서의 기능은 못하고 있지만, 의림지는 지금도 여전히 저수지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다. 의림지는 농업용수를 대는 관개시설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경치의 휴식 공간으로서 예로부터 주위 주민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어왔다. 의림지에는 이전에도 서너 차례 찾은 적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 찾은 것이 15년 전쯤이었는데, 그때 이미 단순한 저수지에서 탈피하여 산책로, 인공폭포 등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서 새단장을 하고 있었다. 둘레가 2킬로 정도로 그다지 크지 않은 저수지이나 오랜 역사성과 주위 경관이 빼어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비 속의 의림지는 한 폭의 동양화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호수 가운데는 작은 섬이 하나 있고, 호수 둘레는 수양버들 나무가 서있으며, 호수 주위로는 깨끗이 포장된 도로가 나있다. 비가 심하게 내려 걷기가 부담스러웠지만 이왕 왔으니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하였다. 호수 한편에는 인공폭포인 <용추폭포>가 있다. 15년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좀 어설픈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주위의 보행 데크와 아름다운 다리와 정자, 그리고 폭포 앞 작은 호수와 그 가운데 있는 분수가 서로 어울려 좋은 경치를 만들고 있다. 보행 데크를 따라 걷고 싶었지만 비가 너무 세차게 내려 그만두었다. 평일 낮인 데다 심한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15년 전의 의림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는 의림지 일대를 한창 새로이 개발하고 단장하던 시기였는데, 너무 싸구려로 좀 천박하게 개발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오늘 이곳에 와서 보니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호수와 주변 경관이 어울려 차분한 동양적 미와 화려함을 동시에 가진 그런 느낌이 든다. 여하튼 개발 도중의 황량하고 어설픈 모습을 보고, 전체를 판단할 일은 아니다.
제천에는 세명대학교가 있는데 전에도 이 대학을 몇 번 찾은 적이 있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세명대학교를 둘러보기로 했다. 친구인 이봉수 교수가 세명대학교의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설립 때부터 오랫동안 대학원장으로 있었다. 얼마 전까지 대학원장으로 있었으나, 지금은 대학원장은 그만두고 교수로만 있는듯하다. 이 친구는 한겨레신문 경제부장, 논설위원 등 언론인으로서 활약을 하다 늦은 나이에 영국 유학을 하여 저널리즘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아왔다. 우리나라 언론인 출신으로서 저널리즘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은 이 친구가 거의 유일하지 않나 생각한다.
요즘 학생들이 모두 서울로, 수도권으로 몰리는 바람에 지방대학은 매우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세명대학교의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은 다르다. 요즘은 언론사에 취업하는 것이 하도 어려워 언론사 시험을 “언론고시”라고까지 하는 것 같은데,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에서는 1년에 거의 20-30명씩을 언론사에 합격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언론 명문으로 소문이 나서 지금은 서울의 명문대학 졸업자나 외국 유학을 한 학생들도 많이 지원을 한다고 한다. 교수들이 학생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밀착하여 지도를 한 결과라 생각한다.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매체로서 <단비뉴스>라는 것이 있다. 학생들에게 언론인으로서의 훈련을 시킬 겸 올바른 저널리스트로서의 소양을 키우기 위해 만든 매체인데, 일반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여기에 괜찮은 보도들이 꽤 많아 언론인이나 전문가들 사이에는 꽤 평판이 있다고 한다. 나도 여기에 몇 년 전 <통계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약 30여 회에 걸쳐 칼럼을 연재한 바 있다. 통계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통계에 대한 일반인들의 상식과 소양 함양에 도움을 주기 위한 글이었다. 어제 어떤 중견 출판사에서 연락이 와서 이 칼럼을 극찬하면서 꼭 출판을 하고 싶다고 한다. 나도 기꺼이 응락하여 얼마 뒤면 이 책이 출판될지도 모르겠다.
세명대학교는 의림지에서 조금 떨어진 산 중턱의 넓은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지방의 사립대학으로서는 상당히 충실한 편인데, 요즘은 학생들이 지방대학을 멀리하는 바람에 이 대학도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의 편중은 우리나라가 유독 심한 것 같다. 선진국들 가운데 우리나라와 같이 대학들이 서울로 집중되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것 같다. 15년 전에 왔을 때는 학교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좀 황량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제는 주위의 나무도 많이 자라고, 조경도 잘 되어 학교가 제대로 틀을 잡은 것 같다. 온 김에 친구를 만나고 싶었지만 출발 전에 전화를 해보니 지금은 서울에 있다고 하여 만나는 것은 불발되었다. 비 때문에 차에서 내리지는 못하고, 차를 타고 캠퍼스 이쪽저쪽을 둘러보았다.
이젠 바로 집으로 직행한다. 앞으로 자연휴양림을 예약해 둔 곳이 4곳 더 있다. 진부령에 있는 용대리 휴양림, 서산에 있는 용현 휴양림, 남해의 편백휴양림, 그리고 군산의 신시도 휴양림이다. 다음 주 한 주를 쉬고는 4주 연속 여행이다. 체력을 충분히 비축해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