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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청태산 자연휴양림 여행(1)

(2021-05-26) 월악산 덕주산성과 충주 탄금대(彈琴臺)

by 이재형

오늘(5. 26)부터 2박 3일간 강원도 횡성에 있는 청태산 자연휴양림 여행이다. 여행을 다녀오면 너무 피곤해서 한 주일 가량은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떠나고 싶어 진다. 자연휴양림 여행에서 숙소인 <숲속의 집>에 의자가 없어 불편했는데, 며칠 전 집 근처에 있는 코스트코에 가서 휴대 가능한 의자 2개를 샀다. 이만하면 이전보다는 훨씬 준비가 잘 된 셈이다.


이곳 세종에서 청태산 휴양림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은 [경부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길이지만, 바쁠 일이 없으므로 충주를 거쳐가는 국도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작년부터 강원도 방면으로 여행을 갈 때는 항상 충주를 거쳐가는 국도를 이용했으므로, 이 길도 이제 상당히 익숙해졌다. 그런데 요즘은 국도는 속도제한이 너무 많아 고속도로에 비해 피곤하다. 속도제한도 일정한 것이 아니라 어떨 때는 80킬로로 다니다 사정에 따라 70킬로, 60킬로, 심지어는 40킬로, 30킬로로 제한되는 곳도 있으므로, 거기에 신경을 쓰다 보면 심한 피로감을 느낀다.


1. 덕주산성(德周山城)과 덕주사(德周寺)


처음 찾아갈 곳은 월악산에 있는 덕주산성과 덕주사인데, 특이하게도 덕주산성 안에 덕주사라는 절이 있다. 덕주사는 신라 말기 경순왕의 딸인 덕주공주가 세웠고, 덕주산성은 고려말 혹은 조선시대에 축성을 했다고 하니, 시대 순으로 봐서는 덕주사라는 절이 있어, 산성의 이름도 절의 이름을 따서 덕주산성이라 이름 붙인 것 같다. 월악산 국립공원 입구를 지나 한참 달리니 덕주산성의 서문이 나온다. 작은 산성치고는 성문이 상당히 웅장하게 보인다. 성문은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보이고, 성벽은 옛 모습 그대로인 것 같다.


성문을 지나 좁은 도로를 달리면 금방 덕주사로 가는 산길이 나온다. 주위에 음식점들이 많은 것을 보니 사람들이 꽤 많이 찾는 곳인 것 같다. 계곡 옆으로 나있는 산길을 따라 자동차로 2-3분 정도 올라가면 가파른 산 위에 서있는 덕주사가 나온다. 이 절은 6세기 신라 진평왕 때 세웠다고 하기도 하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딸인 덕주공주가 마의태자 일행과 함께 이곳을 들렀을 때 이 절을 세워 덕주사라 이름 지었다고도 한다. 지금의 절 건물은 1970년에 중창된 것이라 하니, 비교적 새 건물이다. 이곳에서 2킬로쯤 산길로 올라가면 보물로 지정된 덕주사 마애불이 있다.


주차장에서 절로 올라가는 길은 20-30미터 남짓하지만 무척 가파른 계단이다. 그런데 절 입구로 들어서니 어딘가 풍경이 익숙하다. 절 마당 앞에는 거대한 남근석(男根石)이 우뚝 서있다. 그렇다. 이곳은 작년 가을 대관령에 가면서 들렀던 곳이다. 그때 들린 후 여행기까지 써놓곤 깜박 잊고 같은 곳을 다시 들린 것이다. 요즘 여행기를 쓰는 목적 가운데 다녀온 곳을 잊어버리지 않게 기억해두는 것인데, 여행기를 써놓고도 금방 잊어버리니.. 참..


작년 가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늦은 단풍이 지는 시기였다. 그래서 약간 쓸쓸한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나무에 잔뜩 물이 올라 녹음이 우거진 계절이다. 작년에 보았던 풍경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작년에는 서두르느라 절 모습만 대충 보고 지나쳤는데, 이번엔 시간 여유도 있어 느긋이 감상하여야겠다. 덕주사는 조그만 절이다. 그래서 절집은 그다지 볼만한 것이 없다. 대신 절 주위의 계곡이 아주 멋있다. 절을 거쳐 계곡으로 내려가 산 쪽으로 오르면 계곡을 지나가는 나무다리가 있고, 계속하여 계곡을 따라 짧은 보행 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계곡은 녹음에 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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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의 계곡은 넓고 긴 계곡을 따라 큰 바위틈을 따라 흐르는 계곡이 볼만하다면 이곳 계곡은 좁지만 우거진 숲 속을 따라 내려오는 계곡이 볼만하다. 시원한 계곡 바람이 불어 이마의 땀을 식혀준다. 이 길을 따라 2킬로 정도를 올라가면 마애불이 있다고 하는데, 갔다 오기엔 시간이 너무 걸린다.


2. 충주 세계무술공원


충주는 무술(武術)의 고장이다. 뜬금없이 왜 갑자기 충주가 무술의 고장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충주 세계무술공원과 함께 세계무술박물관을 건립하고, 몇 번의 세계무술대회를 개최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무술에는 전혀 소질이 없지만 이에 대해 보고 듣는 것은 좋아하므로, 이전부터 이곳을 한번 찾아보고 싶었다. 세계무술공원 안에는 세계무술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다.


충주 세계무술공원은 남한강 변에 위치하고 있다. 충주시 도심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는 곳인데, 공원은 널찍하고 평평한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주차를 하고 내리니 내리쬐는 햇볕에 걷기가 싫다. 세계무술공원은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공원이다. 조금 특별하다면 무술공연을 할 수 있는 큰 야외 공연장이 있다는 정도. 박물관만 구경하고 가기로 하였다.


청주 무술박물관은 5층으로 된 상당히 큰 건물이다. 4층과 5층은 전망대와 함께 행정 및 관리실로 사용되는 것 같고, 1, 2, 3층은 전시실이다. 박물관으로 들어서니 직원이 3층으로 가서 내려오면서 관람하는 것이 좋다고 권고한다. 1층은 한국 무술, 2층은 서양 무술, 3층은 세계 및 서양 무술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전체 전시를 보고 난 느낌은 한마디로 실망이다. 건물, 즉 하드웨어는 현대식으로 막대한 예산을 들여 잘 지었지만, 소프트 웨어 즉, 콘텐츠는 정말 형편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말 건물이 아깝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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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박물관이라면 상당히 특색 있는 박물관으로서, 소재와 전시 방법도 무궁무진할 텐데 어떻게 이런 한심한 전시물로 채웠는지 정말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물에 어떤 확실한 주제도 보이지 않고, 전시물도 그저 그런 사진과 그림, 그리고 무술 도복 정도이다. 요즘은 과거와 달라 지방의 작은 박물관에 가더라도 이전에 비해 내용이 상당히 알찬 곳이 많은데, 이곳은 그 많은 돈을 들이고 어떻게 이 정도의 콘텐츠로 채웠는지 한심하기 그지없다. 지금이라도 각계의 전문가들을 충분히 활용하여 좀 더 관람객의 흥미를 끌 수 있도록 콘텐츠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여야 할 것이다.


3. 탄금대(彈琴臺)


다음은 탄금대(彈琴臺)이다. 가야금을 발명한 가야의 우륵이 신라로 망명을 한 후 이곳에 진흥왕을 모신 자리에서 가야금을 연주하여 진흥왕을 감동시켰다고 하여 <탄금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탄금대를 중심으로 이곳은 <탄금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무술공원에서 차로 2분 정도 걸릴 정도로 거의 붙어있다.


탄금대는 남한강변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맞서 신립(申砬) 장군이 8천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웠던 곳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대패하여 지휘관인 신립 장군을 포함한 8천의 병사가 전멸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왜군은 아무 저항 없이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치고 올라와 한양에 무혈입성하게 되었다.


탄금대 공원으로 가니 주차장이 좁은 탓인지 평일인데도 주차할 자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처럼 찾아온 이곳을 그냥 돌아갈 수도 없어 염치 불고하고 길가에 개구리 주차를 하였다. 그런데 탄금대라 하여 찾아왔지만 어디가 탄금대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주차장 바로 옆은 전망대인데 남한강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 이곳이 탄금대인가? 아니면 이곳 언덕 전체를 탄금대로 하나? 잘 모르겠다. 여하튼 전망대에서 잠시 남한강 경치를 감상하다가 공원 안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갔다. 곧 충혼탑이 나온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병사들을 기리는 곳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고 6.25 사변 때 전사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한 탑이라 한다. 이 탑을 돌아가면 또 하나 높은 탑이 나오는데, 이 탑이 임진왜란 때 전사한 조선군사들을 추모하는 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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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지나 한참 걸어 들어가면 남한강변을 내려다보는 언덕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가면 <탄금정>(彈琴亭)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남한강 전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군과 왜군이 싸운 탄금대는 어디인가? 조선군은 남한강을 등지고 배수진으로 왜병에 맞섰다고 한다. 그리고 주로 기병으로 이루어진 조선군은 비 온 뒤 질퍽한 땅에 말들이 제대로 달리지를 못해 패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전투지는 남한강변 평지일 텐데 그곳이 어디일까? 내려다보니 평지에 세계무술공원이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전투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곳이 아니면 달리 전투가 벌어질 넓은 평지가 보이지 않는다.


잘 아시다시피 신립은 왜병을 막기 위한 방어지로 두 곳을 고려했다고 한다. 한 곳은 새재, 즉 조령이며, 다른 한 곳이 바로 이곳 탄금대이다. 많은 참모들이 험한 새재에서 왜군을 맞아 싸워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신립은 병사들의 탈영을 막고, 또 죽을 각오로 싸우기 위해서는 배수진을 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하여 이곳을 전장으로 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전은 대실패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8천의 조선군사 중 살아남은 사람이 열명이 못될 정도로 거의 전멸한 대패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만약 주위의 평가대로 조령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군은 그야말로 백전노장들이었다. 왜군들은 수십 년 동안 전투에서 단련된 정예병이며, 지휘관들은 병사들과 몇십 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해왔다. 이들은 병사 개개인의 전투능력도 높을 뿐 아니라 지휘체계가 확립되어 있고, 또 전술훈련도 잘 되어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은 병사 수도 1만 5천 명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조선군은 8천 명 정도였고, 그것도 총사령관인 신립 장군이 직접 이끌고 내려간 병사들은 100명도 되지 않았다. 한양에서 전투지인 충주로 내려오면서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아 겨우 만든 8,000천 군사였다. 그랬기 때문에 지휘체계란 것이 제대로 서있을 수도 없으며, 또 전술훈련이 되어 있을 리도 없었다. 이러한 군사들이 정예병인 왜군들과 싸웠을 때 그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재에서 만약 싸웠다고 하더라도 하루 이틀 정도는 더 버텼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방어한다는 것은 아마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다만, 새재에서 싸웠다면 패배한 병사들이 이곳저곳으로 도망을 가거나 몸을 숨길 수 있어서 탄금대 전투와 같은 처참한 인명피해는 피하였을지도 모를 것이다.


왜적이 침략하기 전 율곡 선생은 <10만 양병론>을 주장하였으며, 만약 율곡의 주장을 들었다면 임진왜란과 같은 비극을 막았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분들도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것도 거의 불가능하였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의 10만 병사라면 당시 인구를 고려할 때 현재 우리가 거의 100만 군대를 보유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군대란 것은 원래 “돈 먹는 하마”이다. 그 당시 조선의 경제력으로는 10만의 상비군을 유지한다는 것은 아마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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