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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장 달음산자연휴양림 여행(6)

(2021-05-14) 김수로 왕릉과 봉하마을

by 이재형

가덕도를 차로 둘러보는데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이제 시조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간다. 이번 행선지는 가야국(금관가야)을 창시한 김수로 왕릉이다. 김수로 왕릉은 김해 시내에 있는데, 주택지와 상업지가 혼재된 지역 가운데 넓은 터를 잡고 있다. 시내에 위치한 탓인지 주차장이 아주 좁다.


17. 김수로 왕릉


오늘은 날씨가 정말 덥다. 김수로 왕릉의 정문을 들어서면 곧 큰 왕릉이 나온다. 그리고 왕릉 옆에는 여러 채의 전간들이 서 있다. 좀 전에 김수로 왕이 나의 시조 할아버지라고 했는데, 성이 김씨인 김수로 왕이 어떻게 성이 이가인 나의 할아버지가 될까?


나의 성씨는 인천 이가(仁川 李哥)이다. 김수로 왕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許黃玉)과 결혼을 하였다. 허 왕후는 모두 10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수로 왕은 이중 2명의 아들에게 어머니의 성인 허씨 성을 쓰도록 허락하였다. 그러고 보면 김수로 왕은 이미 2,000년 전에 현대인보다도 앞서 여성의 지위를 인정한 선각자라 하여야 하나? 김수로 왕은 김해 김씨의 시조이며, 허씨 성을 받은 받은 두 아들은 김해 허씨가 되었다. 고려 초에 김해 허씨 문중에 허겸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황제로부터 이씨 성을 받아 인천을 통해 귀국하였다. 그래서 이 분이 인천 이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매년 김수로 왕의 자손들은 <가락대종친회>(駕洛大宗親會)란 이름으로 성대한 제례를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에는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가 포함된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젊을 때만 하더라도 우리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같은 집안이라 하여 혼인을 하지 않았다.


여하튼 시조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았지만 별다른 느낌은 없다. 가야는 어떤 나라였을까? 실제로 우리는 가야가 어떤 나라였는지 잘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가야에 대한 역사기록은 극히 제한되어 있어 가야의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자료가 너무 제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임나일본부 설을 내세워 야마토(大和) 조정(朝廷) 시대 일본인들이 임나가야(대가야)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지배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 사실을 8세기 때 쓰여진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역사 책은 오류 투성이이며, 정통적인 역사서로 볼 수도 없다.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였던 야마토 조정이 있던 시기는 일본에 문자도 없던 시대였다. 그리고 야마토 조정의 권력 범위도 겨우 현재의 오사카 일원에 그쳤다. 야마토 조정 자체에 대해서도 그것이 어떤 나라인지 일본 내에서도 베일에 싸인 상태이며, 대략적으로 중앙권력이 아닌 부족 연합체 같은 조직이었을 것이란 것이 일반적 추정이다. 야마토 조정 시대는 일본의 고분시대에 해당하는데, 이 때는 천황이 누구였는지도 불분명할 만큼 베일에 싸인 시대이다. 그런 상황에서 바다 건너 천 킬로나 떨어진 한반도를 지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어차피 역사란 것은 이해 관계가 걸린 나라들이 서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울 뿐이다.


이야기가 너무 옆길로 빠졌다. 김수로 왕릉에는 왕릉 외에도 여러 전각들이 있는데, 사실 이 전각들이 고증에 충실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 왕릉도 정말 김수로 왕이 묻힌 곳인지, 아니면 상징적으로 만든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에 대해 알아보려고 왕릉 이곳 저곳에 쓰여진 안내문이나 설명문을 읽어 보았지만, 그런 내용은 나와있지 않다. 날씨가 너무 더워 나무가 없는 맨땅 마당을 이리저리 걸어 전각들을 구경하는 것도 고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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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봉하마을


다음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사가가 있는 봉하마을이다. 김해 시내를 이리저리 거쳐 가다보니 작은 공업단지 같은 곳이 나오며, 그곳을 지나니까 시골마을이 펼쳐진다. 시골길을 따라 차로 5분 남짓 가니 봉하마을이 나온다. 긴 산을 앞 뒤로 두고 길게 뻗어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니 길 건너편에 봉하장터라는 새로 지은 2층 건물이 보인다. 1층에는 편의점과 카페가 있고, 지하와 2층에는 식당이 있다. 벌써 오후 3시가 지났다. 점심을 먹을려고 들어갔더니 식당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코로나 때문에 참배객들이 크게 줄어 영업을 하지 않는단다. 마침 돼지국밥집과 함께 <봉하 찰보리빵>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돼지국밥 식당 역시 문을 닫아 할 수 없이 찰보리빵을 먹기로 하였다. 한 상자에 만이천원인데 제법 양이 많고 맛도 있다.


노 전대통령의 사저는 마을 입구에서 100미터쯤 들어가면 도로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진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에는 길 옆에 큰 건물이 있길래 그곳이 사저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곳은 경호동이다. 경호동 마당에서는 몇몇 젊은 직원들이 공놀이를 즐기고 있다. 사저는 담당 대신 나무가 심어져 안 쪽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무 담 바로 아래에 조그만 공간이 있는데, 노 대통령 생전에 방문객들이 찾아와 여기서 “대통령님 안녕하세요?”하고 소리를 치면 대통령이 내다보았다고 하는 바로 그 자리이다.


노 대통령 사가를 지나면 바로 노 대통령 묘역이 나온다. 묘지는 평지에 표시석을 만들어 놓은 형태이며, 표시석으로 들어가는 길은 단정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국화 한송이 헌화를 하고 잠시 묵념을 하였다. 참 격정적인 분이었다. 지금의 문 대통령과 반쯤 섞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노 대통령이 이상주의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현실 생활에서 그 “이상”이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상”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그 “이상”이 자신의 이해와 결부될 때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이상에 적대감을 보이는 것이 세상 일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정책을 담당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기념품점이 보이자 집사람이 그리로 들어간다. 한참있다가 포장 상자를 들고 나오는데, 도기로 만든 막걸리 잔을 샀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집에 막걸리 잔이 없어 그동안 밥 그릇으로 막걸리를 마셨는데 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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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의령


고속도로를 타려면 의령을 거쳐야 한다. 오늘 아침 계획으로는 삼천포 항구에 들릴 예정인데, 이미 시간이 늦어 어렵다. 가는 길이므로 의령 구름다리에 가보기로 하였다. 요즘 지역마다 출렁다리니 구름다리니 하고 만들어 놓고 있는데, 인터넷을 보면 의령 구름다리가 가장 쓰릴이 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쓰릴있는 일은 그다지 내키지 않지만 일단 가는 길이니 가보기로 하였다.


의령은 의병(義兵)의 고장이다.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가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곳이 바로 이곳 의령이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의 활약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데, 일본에서도 의병을 조선침략의 중요한 실패 원인으로 꼽고 있다. 약 30년전 일본의 어느 헌책방에서 임진왜란을 다룬 잡지책을 발견한 적이 있다. <역사군상>(歷史群像)이란 잡지로 이 잡지는 나올 때마다 특정의 역사적 사건을 책 한권에 걸쳐 분석하고 있다. 흥미가 있어서 사보았더니, 여기서도 일본의 패전 원인을 (1) 명군의 개입, (2) 이순신 장군의 활약, (3) 의병의 활약의 3가지로 꼽고 있었다.


사실 의병이나 승병(僧兵)은 일본군으로서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이었다. 일본에서는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이전 몇백 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었으나, 그 전쟁은 백성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위의 영주들 끼리 전쟁을 벌이며, 백성들은 이긴 측에 세금만 내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전쟁에서 누가 이기든 관심이 없었다. 또 전쟁은 직업 군인들이 하는 것이며, 백성들이 군대에 동원되는 일도 없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침략군에 대항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못할 일이었다. 승병도 마찬가지이다. 일본도 사찰에는 승병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찰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군대로서, 오히려 백성들을 괴롭히기 일수였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승병이라면 사람들은 아주 좋지 않는 인상을 갖고 있다. 그런 승병들이 조선에서는 목숨을 걸고 적군인 자신들과 싸우려 드는데야 일본군으로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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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에는 의병 박물관이 있다. 그런데 박물관은 시간이 너무 늦어 들리기가 어려워 바로 구름다리로 갔다. 의령 구름다리는 강 위에서 강과 주위의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 놓인 다리이다. 그런데 주차장에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3월부터 6월까지 도색작업을 한다고 구름다리를 개방하지 않는다는 표지가 붙어있다. 할 수 없다. 의령 전통시장에 들렸다가 집으로 가기로 했다. 의령 전통시장에 가니 시장 앞에 뜬금없이 “이재용 회장 즉각 석방하라!”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그렇지.. 이곳 의령은 고 이병철 회장의 출생지이다. 그래서 이재용 회장에 대한 마음도 각별한 모양이다. 시장 안으로 들어갔더니 시장은 꽤 큰데 손님이 거의 없어 한산하다. 특별히 살 것이 있나하고 둘러보았지만 살만한 것이 없었다.


식당이 보여 들어갔다. 젊은 주인이 7천원짜리 쇠고기 뼈해장국을 추천한다. 한참 기다려 해장국이 나오는데 고기양이 엄청 많으며 맛도 아주 좋다. 근래에 식당에서 사 먹은 음식 가운데 가장 좋은 것 같다. 늦은 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제 집으로 출발이다. 의령시내 곳곳에는 이번 삼성일가에서 국가에 헌납한 문화재와 예술품들을 이곳 의령에다 유치하여야 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집사람과 운전대를 교대하면서 집에 도착하니 오후 9시가 넘었다. 집의 소파가 너무 반갑다. 휴양림의 숲속의 집은 다 좋은데 의자가 없어 불편하기 그지 없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방바닥에 앉고 일어나기가 힘들고, 맨바닥에 그냥 앉아있기도 괴롭다. 앞으로는 간이 의자를 가지고 다닐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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