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루팡 3세>을 보며
일본의 인기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우리나라에 거의 수입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 변변한 콘텐츠가 없었던 1960~80년대에는 TV 어린이 방송은 거의 일본 애니메이션 드라마가 독차지하였다. <은하철도 999>, <미래소년 코난>, <베르사이유의 장미>, <기동전사 간담>, <철완 아톰>, <마징가 Z>, <바벨 2세>,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본만화들이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높은 인기를 얻었으면서도 우리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만화가 있었으니, 바로 <루팡 3세>이다. 이 만화는 유럽에서 몸을 피해 일본으로 온 프랑스의 괴도 아르세느 뤼팽을 할아버지로 두고 있는 천하의 괴도 루팡 3세와 그의 동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루팡 3세는 명석한 두뇌와 신출귀몰한 재주, 그리고 가공할 격투술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예쁜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호색한이다. 그의 동료 지겐 다이스케(次元大介)는 권총의 명수이며, 전설의 괴도 이시카와 고에몽의 후손인 이시카와 고에몽(石川五ェ門)은 검술의 달인이다. 그리고 문제의 마지막 동료가 있으니 바로 미녀 미네 후지코(峰不二子)이다. 총명한 머리에다가 가공할 전투력, 거침없이 남자를 유혹하는 사교술, 목적을 위해서라면 미인계도 서슴지 않는다. 이 만화의 캐치프레이즈는 "지겐이 쏜다, 고우에몽이 벤다, 루팡이 훔친다, 그리고 후지코가 웃는다"이다.
사실 미네 후지코를 루팡 3세의 동료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루팡을 도우면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배신을 마다하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서는 아무 남자에게나 몸을 허락하지만 루팡 3세에게만은 예외이다. 루팡 3세는 틈만 있으면 후지코에게 달려들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 후지코는 매번 루팡 3세를 배신하지만, 그녀를 향한 루팡 3세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애독자들 사이에서는 루팡과 후지코가 "했는가, 못했는가"가 큰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루팡 3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는 모두 강렬하고 독특하다. 그 가운데서 가장 인상에 남는 캐릭터가 미네 후지코이다. 그래서 십여 년 전에는 <루팡 3세, 미네 후지코란 여자>라는 새로운 작품이 스핀오프되어 나오기도 하였다. 아마 루팡 3세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대상으로 인기투표를 한다면 미네 후지코가 주인공 루팡 3세를 제키고 단연 1등을 차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1970년대 청계천 7, 8가에는 밤만 되면 수없이 많은 책 노점상들이 니타 났다. 그들은 카바이드 조명을 한 리어카에서 헌 책을 팔았는데, 플레이보이나 펜트하우스, 허슬러 등 미국 남성잡지들이 주된 취급품목이었다. 어느 날 그 속에서 <루팡 3세>라는 한 권의 만화책을 발견하고 별생각 없이 사들고 왔다. 집에 와서 읽어보니, 세상에나! 이렇게 재미있는 만화가 있다니!!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도 재미있었다.
다음부터는 서점에 가기만 하면 루팡 3세를 찾았다. 헌책방이 보이면 들어가 찾았고, 리어카 행상이 보이면 꼭 살펴보았다. 나중에는 당시에 많았던 동대문 만화 도매상까지 찾아갔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1994년 1년간 동경에 있는 한 연구소에 객원연구원으로 가게 되었다. 심심할 땐 종종 서점에 들르곤 하였는데, 거기서 그렇게나 찾던 <루팡 3세>를 발견하였다. 그때부터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한 권 한 권 사 모아 마침내 반년에 걸쳐 <루팡 3세>, <신루팡 3세>. <꼬마 루팡>까지 전권 약 25권을 모두 구입할 수 있었다. 이후 몇 년 전에는 루팡 3세 애니메이션 드라마도 모두 다운로드하여 감상할 수 있었다.
루팡 3세 만화 전편을 쌓아놓고 보니 50년 전 청계천에서 구입하였던 그 한 권의 책만큼 재미는 없다. 애니메이션은 더 실망이다. 만화 원전에서 보이는 그 번뜩이는 재치와 매력을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그보다 더 큰 실망은 미네 후지코의 매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강렬했던 섹스어필, 그리고 악녀스러움은 애니메이션에서는 도저히 찾을 길이 없다. 미네 후지코의 매력이 사라진 루팡 3세 애니메이션은 지루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