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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위의 달 그림자를 건지다”

by 이재형

“호수 위의 달 그림자를 건지다”라는 말이 화제가 되고 있다. 윤석열이 헌법재판소에서 이번 내란 사건을 호수 위의 달 그림자를 잡으려는 것처럼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을 사건화하고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 같다.


일단 내란 사건은 제쳐두고라도 이런 멋있는 표현에 대해서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등 칭찬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이 표현에 대해 너무 감탄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은 작년에 방영된 일본 NHK TV 드라마를 통해 화제가 된 문장이다.


2024년에 방영된 일본 NHK 드라마(TV소설) <호랑이에게 날개>(虎に翼)는 일본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여성 판사, 여성 법원장으로 활약하였던 미부치 요시코(三淵嘉子, 1914~1984)를 모델로 하고 있다. 드라마 속에서 미부치 요시코는 이노쓰메 도모코(猪爪寅子)란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드라마 속에서 도모코가 법대에 재학시 그녀의 아버지는 교아사건(共亞事件)에 억울하게 말려든다. 그녀는 변호사들과 함께 아버지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무죄 선고를 맏는다. 이 재판에서 재판장은 “검찰측의 주장은 증거가 불충분한 것이 아니라, 범죄 사실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면서 “검찰이 스스로 미리 짜맞춘대로 사건을 끌고 나간 것이, 마치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는 것과 같다”(あたかも水中の月影を掬いあげようとするかのごとし)고 하며 무리한 기소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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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소설 <호랑이에게 날개>

물속에 비친 달은 실체가 없으므로 건질 수 없다. 검찰이 허위 자백을 강요하여 이것을 유일한 증거로 내세운 이 사건은 아무 실체도 없는 것이라 하여 판결문을 통해 검찰의 강압수사를 준엄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이 재판 장면은 일본의 헌법기념일인 5월 3일에 방영되었다. 시청자들은 헌법기념일에 맞춰 드라마 속에서 이러한 명판결을 접하고 열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물에 비친 달을 건진다”라는 말은 드라마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판결문이다. 이 말은 1934년 일본 전체를 떠들석하게 하였던 소위 <데이진 사건>(帝人事件)의 판결문에 들어가 있던 문장이다. 데이진 사건의 개요는 이하와 같다.


당시 일본의 대형 섬유회사였던 제국인조견(帝國人造絹)회사는 모회사인 스즈키상점(鈴木商店)이 도산하면서 주식 전부가 타이완 은행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스즈키상점의 소유주였던 가네코 나오키치(金子直吉)가 당시 문부대신 등 고위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주식 절반을 다시 매입하였다. 이후 이 주식 가격이 폭등하면서, 많은 고위관리 등이 여기에 부정개입하였다는 이유로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이토(斎藤) 내각은 총사퇴한다.


1935년 동경형사지법은 이 사건에서 기소된 피고인 16명에 대해 전원 무죄를 선고하였다. 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검찰의 기소를 "사법 파쇼"라고 부르며 검찰의 강압수사를 강력히 비난하였다. 이 판결문에서 법원은 검찰의 무리한 기소를 "물 속에 비친 달을 건지듯"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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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진 사건에 대한 기사와 재판기록

이 판결문이 명문이었다고는 하나, 법조인들이나 알고 있던 말이었다. 그것도 90년 전에 쓰여진 판결문이었기 때문에 아마 법조인들 조차도 이 문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법조사회에서나 떠돌던 말이 90년이나 지나 화려하게 대중 앞으로 다가온 것은 위에서 말한 TV 드라마 덕택이었다. 그리고 이 말을 2025년 한국의 헌법재판소에서 듣게 되리라고는 아마 드라마 작가로서도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참고로 "물 속에 비친 달을 건지다"란 말은 "춘산야월"(春山夜月)이라는 제목의 당시(唐詩) 속에 나오는 "掬水月在手"(물속의 달처럼 달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라는 구절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우리의 표현은 "월인천강"(月印千江), 즉 “달은 천 개의 강에 공평하게 비춘다” 쯤 될 것 같다. 갑자기 대입 수험공부를 할 때 “월인천강지곡”을 외우던 때가 생각난다.


내친김에 “달 그림자”라는 뜻의 “월영”(月影)은 일본어로는 음독으로는 “게츠에이”, 훈독으로는 “쓰키카게”로 발음된다. 게츠에이라 발음한다면 “달빛의 그림자”란 뜻이다. 달빛을 받아 생긴 사람이나 사물의 그림자가 “게츠에이”이다. “쓰키카게”는 거울이나 물 등 다른 물체에 비친 달의 모습을 의미한다. 그래서 호수 속에 비쳐진 달의 모습은 “쓰키카게”이다.


"사법파쇼"라는 강압적인 검찰권 행사를 비판한 "물 속에 비친 달을 건진다"라는 표현을 검찰권을 제멋대로 악용한 자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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