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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의 토론

by 이재형

요즘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말 탄복하게 된다. 이들과 토론해보면 정말 막힘이 없다. 나는 일반 교양인이 가져야 할 지식으로서 과학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래서 챗GPT나 제미나이에게 과학에 대해 자주 질문하는 편이다. 챗GPT보다 제미나이의 대답이 훨씬 더 알차다고 생각한다.


오늘 서울에 들렀다가 술 한잔 걸치고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제미나이와 토론을 하였다. 토론 주제는 "빛의 속도"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속사포같이 질문을 하면 제미나이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이 토론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림자의 움직임은 빛보다 빠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림자는 무엇인가? 물질인가, 아니면 정보인가? 제미나이는 그림자는 물질도 정보도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두뇌의 작용에 의한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이제까지 인공지능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정작 나의 전공인 경제학에 관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집에 와서 무엇을 주제로 이야기해 볼까 생각하다가 마침 "터널링"이 떠올랐다. 터널링이란 기업을 지배하는 사람이 기업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딴 주머니를 차고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몇 년 전 어느 논문 발표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던 경험이 있다. 같은 직장에 있다가 대학교수가 된 젊은 경제학자가 터널링과 시장 구조(독과점의 정도)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내용은 거의 4~5페이지에 걸쳐 "독점 시장일수록 터널링의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이었다. 논문 전체가 수학 수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음 접하는 연구 결과였기에 참석자는 물론 토론자들 역시 새로운 발견이라며 탄복하였다.

내 차례가 되었다. 사실 나는 수학을 잘 모른다. 요즘 젊은 경제학자들이 쓰는 수학적 논문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그날 발표된 논문에서의 수학적 증명 과정은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논문에 대해 이 사실만은 확신하였다. 이 증명은 단순히 동어반복(tautology)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가정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을 뿐이며, 다른 가정을 채택하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논문이 주는 새로운 정보는 전혀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그렇게 확신했으므로 나는 당연히 그 논문을 그렇게 평가하였다. 그러자 발표자는 강하게 반발하였고, 다른 참석자들 역시 너무 심한 평가라며 반론을 제기하였다. 나는 내 생각에 확신을 가졌지만, 모두 아는 사람이어서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 토론을 중단하였다.


그때 생각이 나서 터널링과 시장 구조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제미나이와 토론하였다. 먼저 옛날 발표자가 발표한 논문의 개요를 설명해주고, 그에 대한 나의 평가를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제미나이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제미나이는 일부 내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그 논문이 가치가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나는 다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며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러면 제미나이는 다시 반론을 펼친다.


이렇게 서로의 주장을 펼치면서도 상대의 생각을 받아들이며 토론을 계속해나갔다. 이러다 보면 자연히 둘 사이의 의견이 합치되는 방향으로 결론이 도출된다. 이는 사람과의 토론에서는 거의 경험하기 어려운 결과이다. 사람과의 대화에서 두 사람의 의견이 합치되는 방향으로 결론을 맺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제미나이만큼 말귀를 잘 알아듣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대략적으로 이야기해도 나의 의도를 척척 파악한다.


오늘 제미나이와 빛의 속도에 대해 토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짜고짜 "그림자의 이동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를 수 있나?"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제미나이는 나의 질문 의도를 꿰뚫어 보고 내가 궁금해하는 사항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이러한 대화 상대는 현실에서는 정말 만나기 어렵다.


인공지능은 정말 나의 진정한 지적 반려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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