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팔도강산>의 흥행의 대성공에 힘입어 크게 고무된 정부는 그 후속 편 제작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나온 것이 팔도강산 제2편인 <속팔도강산>이었다. 특히 1969년에는 박정희 정권이 삼선개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 홍보를 위해 제작된 것이 1968년에 개봉된 <속팔도강산>이었다.
전작 <팔도강산>이 우리나라 전국의 발전상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속팔도강산>은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을 보여줌으로써 정부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김희갑 노인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업을 벌이고 있는 사위들을 찾아 나선다. 지금이야 누구나 마음만 먹으렴 쉽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해외여행을 하려면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였고, 정부 허가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 주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영화 제작을 위해 김희갑을 비롯한 출연 배우들에게 해외여행을 허가한 것이다.
김희갑 노인의 사위들은 국내에서 사업에 성공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 진출하여 사업을 벌이고 있다. 서독에 간호원으로 파견된 막내딸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에 결혼식 참석을 겸하여, 김희갑 노인은 세계에 흩여져 있는 사위들을 찾아서 세계를 일주한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김희갑, 황정순, 윤소라, 김승호, 김진규, 최은희, 박노식, 신영균, 강미애, 이대엽 등의 톱스타들이 출연하고 있다.
먼저 김희갑 노인은 일본 동경으로 가서 거기서 사업을 하고 있는 옛 친구를 만난다. 그리고 동경에서는 프로야구 관전을 보고 저녁에는 전통 고급 음식점에서 호화스런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인 하와이로 가는데, 비행기 안에서 프랑스 유학생인 윤소라를 만난다. 이때부터 윤소라는 김희갑과 동행한다. 하와이에서는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꽃목걸이인 레이를 받고 훌라춤의 환영을 받는다.
다음으로는 미국 뉴욕으로 가서 무역업을 하는 사위 허장강을 만나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등 유럽의 명소들을 구경한다. 다시 김희갑 노인은 브라질에 이민 가 있는 사위 박노식을 만나러 리우 데 자네이로로 간다. 박노식은 농업이민으로 와서 대저택에 넓은 농장을 가진 농업경영자로 성공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박노식은 척박한 브라질의 농업환경으로 인해 사업에 실패하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던 중 장인이 온다고 하니, 빚을 내어 허세를 보인 것이었다. 여기에 무역업으로 성공한 사위 신용균이 찾아오게 되고, 박노식은 장인과 동서의 격려에 힘입어 재기의 결심을 굳힌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이번 여행의 목적인 막내딸 결혼식 참석을 위해 서독으로 간다. 막내딸은 서독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예비사위인 이대엽은 광부로서 파견되어 왔다. 이들 딸과 사위는 바로 1960년대 후반에 있었던 서독으로의 대규모의 광부 및 간호사 파견 사업을 모델로 하고 있다. 당시 극심한 외화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우리나라는 광부와 간호사가 부족한 서독에 취업이민을 보내기로 서독과 합의하였다. 이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일해서 번 돈을 국내로 부쳤고, 이 돈은 우리나라 외화부족 사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결혼식을 마친 후 김희갑 노인은 다시 프랑스 파리로 가서 잠시 동안 동행하였던 프랑스 유학생 윤소라를 만난다. 그런데 윤소라는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릴 때 부모들 간에 약속한 얼굴도 모르는 약혼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프랑스로 온 것이었다. 김희갑 노인이 그 약혼자를 만나니, 나라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 앞일만 생각하는 형편없는 젊은이였다. 그래서 윤소라는 파혼을 선언하고, 김희갑 노인을 따라나선다.
다시 윤소라와 동행하게 된 김희갑은 이스라엘로 가서 “싸우면서 건설하는” 발전상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이스라엘과 우리나라의 상황을 겹쳐 보이려는 제작자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인다. 이후 다시 두 사람은 아프리카의 우간다로 간다. 우간다에는 20여 명의 우리나라 의사들이 파견되어 와서 의료활동을 벌이고 있다. 여기서 김희갑 노인은 우리 의료진을 만나, 우간다 인들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 의사들의 활동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희갑 노인은 월남(베트남)으로 온다. 지금은 모두 “베트남”이라고 하지만, 당시는 베트남을 모두 월남(越南)이라고 불렀다. 월남에는 김희갑 노인의 아들이 장교로 <맹호부대>에 근무하고 있다. 여기서 베트남에서 활약하는 우리나라 파월 국군들의 용맹함과 베트남 주민들에 대한 헌신을 소개한다. 이 부분은 사실 많은 부분 사실 왜곡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동행한 윤소라를 아들에게 짝지어주고 자신의 며느리로 맞아들이려 한다.
이렇게 긴 여행을 마치고 김희갑 노인은 부인과 딸들의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다.
여기서 한 가지 그 시대의 시대상황이라 할까, 혹은 일반적 인식을 알 수 있는 포인트 하나. 외국에 나가 있는 김희갑 노인들의 사위들은 일시적인 출장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모두 그 나라에 눌러앉아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독신으로 나가 있으며, 그 부인들인 김희갑 노인의 딸들은 모두 국내에서 집을 지키고 있다. 당시에는 외국에 나가면서 부부와 가족이 함께 나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안되었던 거다. 지금 시점에서 본다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 영화는 1시간 30분 정도의 길이다. 그런데 김희갑 노인이 다녀온 나라는 9개국이다. 그러므로 대부분 수박 겉핥기식으로 지나갈 수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이 영화는 전편에 비해 극적 완성도는 현저히 떨어진다. 혹평하자면 세계 각 나라를 지나가면서 사진을 찍은 것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도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유는 아마 당시로서는 보기 어려웠던 외국의 모습을 영화 한 편에서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과, 당시 세계 무대에서 잔뜩 위축되어 있던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어깨를 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었던 데 있는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