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7) 칭다오에서 둔황까지- 중국 횡단여행 (11)
오늘은 용문석굴에 간다. 집사람은 너무 피곤하다면서 그냥 호텔에 남아있겠다고 한다. 어제저녁 산책을 하다가 근처에 발마사지 집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에서 마사지나 받으며 오늘 하루 쉬겠다고 한다.
그런데 알리페이가 여전히 문제이다. 아침에 시험 삼아 한번 사용을 해보았는데 여전히 안된다. 어제저녁 카드 정지 해제신청을 하자 2시간 뒤에 심사결과를 알려주겠다는 메시지가 있었는데 아직도 가타부타 연락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카드를 등록해 볼까 생각해 봤지만, 출발할 때 한 장만 제외하고 모두 빼두고 왔다. 집사람도 알리페이 앱을 설치했으나, 어쩐 일인지 되다 안되다 한다.
트레블 월렛으로 현금을 인출해서 사용할 수도 있지만, 모바일 결제가 일반화된 중국에서는 너무나 불편하다. 웬만한 곳에서는 거스럼 돈을 준비해두지 않기 때문에 현금 결제를 할 때마다 골치가 아프다. 특히 택시를 타고 운전사가 거스럼돈이 없다고 하면 아주 낭패다. 트레블 월렛 카드를 등록해 볼까 했으나 안된다. 그러다가 세종시 교통카드가 생각났다. 혹시 해서 등록을 해보니 된다. 이것으로 일단 알리페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낙양 최고의 명소라면 단연 용문석굴(龍門石窟)이다. 용문석굴은 낙양의 남쪽에 있는 이하(伊河)를 따라 조성된 대규모 석굴 사원이다. 중국의 불교 석굴 예술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용문석굴은 이하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용문산(서산)과 향산(동산)의 석회암 절벽을 따라 약 1km 구간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총 2,345개의 크고 작은 석굴과 10만 존(尊)이 넘는 불상, 2,800여 개의 비문(조상기 등)이 새겨져 있는 대규모 유적이다. 용문석굴은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 대동(大同)의 운강석굴(雲岡石窟)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꼽힌다.
용문석굴은 5세기말 북위(北魏) 시대부터 시작되어 당나라 때 가장 활발하게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 400여 년에 걸친 역대 왕조의 불교 미술 양식이 한 자리에 모여 있어 고대 불교미술의 변천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용문석굴은 중국의 다른 문화재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통해 예약을 하여야 한다. 어제저녁 트립닷컴을 통해 예약했는데, 입장료는 90위안이다. 어제 갔던 백마사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경로무료는 중국인들에게만 적용된다. 택시를 타고 용문석굴 입구에 내렸다. 하늘은 곧 비가 내릴 듯 잔뜩 찌푸리고 있다. 입구에는 흰 화강암으로 만든 몇 개의 거대한 문이 있다. 이곳에서 용문석굴 지역까지는 1킬로 정도 된다. 걷기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유료 전동카트가 마련되어 있다.
구태여 전동카트를 탈 필요가 없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걷는 것이 훨씬 좋다. 용문석굴 구역까지는 조경이 잘 된 숲길이다. 숲길을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아주 상쾌하다.
용문석굴 구역으로 들어왔다. 앞에는 이하강이 흐르고 오른쪽 석벽에는 수많은 석굴들이 뚫어져 있다. 석굴을 탐방하기 위한 계단길도 잘 정비되어 있다. 석굴이라고는 하지만 그다지 깊지는 않다. 그저 불상을 모셔놓을 정도의 얕은 굴이다. 크고 작은 굴 속에는 그 굴의 크기에 맞는 크고 작은 불상들이 모셔져 있다.
석굴도 좋지만 그 앞을 흐르는 이하강도 절경이다. 한강의 반보다 조금 더 넓은 정도의 강인데, 누런색의 황톳물이 흐른다. 석굴이 있는 구간은 전체적으로 1킬로 정도 된다. 그렇지만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힘이 든다. 아마 걷는 거리로 치면 2킬로가 훨씬 넘을 것이다. 다행히 날씨는 잔뜩 흐리지만 비는 내리지 않는다. 만약 비까지 내린다면 위험해서 이 길을 피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거대한 굴이 나타난다. 굴이라기보다는 절벽 한쪽을 잘라낸 듯한 곳이다. 이곳은 봉선사동 (奉先寺洞)으로 용문석굴의 하이라이트이자 당나라 석굴 조각 예술의 최고 걸작이다. 당 고종 때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후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중앙에 높이 17미터가 넘는 거대한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이 좌정하고 있다. 이 비로자나불은 측천무후의 용모를 모델로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얼굴은 상당히 온화하면서도 위엄 있는 모습이다. 측천무후는 보통 폭군이자 악녀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녀의 이미지가 부처와 어떻게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봉선사동 이후에도 석굴은 계속된다. 어떤 석굴은 규모는 큰데 내부가 비어있다시피 한 경우도 있었다. 근대 중국이 서구의 침략을 당할 때 이곳의 많은 유물들도 해외로 약탈되었다고 한다. 특히 용문석굴의 유물들은 미국에 의해 대량 약탈되어 지금도 미국의 유명 박물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로서 서산의 석굴을 대충 둘러보았다. 서산의 석굴이 끝나는 지점에 다리가 있으며, 그 다리를 건너면 동산으로 간다. 동산에는 석굴이 그다지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동산에서 강 건너 서산을 보면 용문석굴의 전체 모습을 잘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점심도 못 먹고 다리도 아파 거의 탈진상태다. 뭔가 좀 먹고 힘을 차렸으면 좋겠는데 그럴만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터벅터벅 다리를 건넜다. 다리 위에서 보는 이하강의 모습은 또 달랐다. 서산의 석굴과 강물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다리를 건너니 몇 군데 휴게소가 보인다. 다리도 쉴 겸 약간의 군것질을 하면서 건너편 서산을 둘러보았다.
강가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산 위로 올라가면 석굴이 나온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미 많은 석굴을 보았는데, 다리도 아프고 해서 더 이상 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근처에 당나라 시인 백거의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패스.
인기 있는 중국 무협영화로서 용문객잔(1968)과 이를 리메이크한 신용문객잔(1992)이 있다. 용문객잔과 용문석굴 사이에 관계가 있느냐고 물어보니 아무런 관계가 없단다. 용문객잔은 그 무대가 옥문관 근처의 사막이고, 신용문객잔은 몽골의 사막이라 한다.
이제 이곳을 나가야 한다. 마침 출구로 나가는 전동카트가 보인다. 더 이상 걷기 싫다. 카트를 탔다.
중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중국을 마치 첨단 사회처럼 묘사한다. 그들은 이미 현금이 사라진 거래행태, 전국에 거미줄처럼 깔린 고속철 노선, IT 분야를 중심으로 하는 눈부신 기술발전 등 그들은 중국이 우리를 까마득이 앞선 듯 묘사한다.
거의 7~8년 만에 중국에 온 것 같다. 닷새가 지났지만 제남과 낙양에서 외국인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우리 부부를 신기한 듯 바라 보는 시선도 몇 번 경험하였다. 그렇지만 중국은 확실히 변해있었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의 건설, 고층 빌딩, 생활 깊숙이 파고든 IT 기술 등 과거와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국이 그다지 선진사회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전체적인 느낌은 우리나라의 1990년대 혹은 2000년대 정도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하드웨어적 측면에서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사회시스템, 시민의식, 옷차림, 생활태도, 공중질서 등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많이 낙후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거래수단의 변화 등 한두 가지 요소가 전반적인 사회발전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하드에어가 급속히 현대화되고 있으니 소프트웨어도 금방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어렵다. 사람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드에어를 바꾸는 건 쉽다. 그렇지만 소프트에어의 변화는 정말 어렵다.
중국사회가 언제 선진화의 단계에 오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