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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의 대군단(大軍團) 진시황 병마용

(2025-10-14a) 칭다오에서 둔황까지- 중국 횡단여행 (45)

by 이재형

(병마용의 군사들, 누구의 얼굴일까?)

병마용의 얼굴은 모두 제 각각이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이것을 만든 장인들은 각각의 용을 만들 때 누구의 얼굴을 상상하며 만들었을까?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당히 눈과 코와 입을 붙여 넣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친지, 친구, 동네사람 등 어떤 특정인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을까?


우리가 지금 보는 서양의 명작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대개 화가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모델로 하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의 경우 예수를 비롯한 등장인물의 얼굴을 다빈치의 주위에 있는 특정인들을 모델로 하여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시대에는 화가에게 돈을 주고 그림 속의 인물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해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럼 병마용의 군사들의 모델은 누구였을까?


병마용은 그동안 TV 등 동영상이나 사진들을 통하여 수없이 봐왔기에 새삼 스러이 큰 감동은 없었다. 오히려 생각했던 것에 조금 못 미치는 감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내가 본 동영상이나 사진들은 전문가들이 최고로 좋은 각도에서 뛰어난 촬영기술로 좋은 조명 아래서 근집하여 촬영한 것이기 때분에 아무래도 현실에서는 그런 멋진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병마용 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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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에 전시된 병마용들

(이 거대한 역사(役事)는 인간의 탐욕의 집합체인가?)

대신 이 엄청난 유물을 보고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지금이야 2000년 전의 고대유적으로서 사람들은 열광하지만,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용한 일인가? 한 사람의 죽음을 위하여 이 어리석은 짓을 하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죽어갔는가?


그런데 이런 무의미한 역사(役事)를 벌인 힘이 어디서 왔을까? 어떤 힘에 의해 이런 일을 의해 수만, 수십만의 사람이 동원되었을까? 이 일에 동원된 한 사람 한 사람이 과연 마음에서 진시황을 존경했을까, 아니면 돈을 위해 혹은 강요에 의해 이 일을 했을까?


진시황이 여기에 동원된 장인이나 인부 개개인에게 명령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측근에게 명령을 내렸고, 다시 그 아래로 아래로 피라미드식으로 명령이 내려갔을 것이다. 그들 중간 단계에 있던 명령을 전달한 사람들은 정말 이 일이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마 대개는 위에서 시키니까 별생각 없이 출세를 위해, 혹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런 명령을 받고 또 전달했을 것이다. 그중에는 출세의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앞장서서 날뛴 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오직 자신만을 위한 조그만 욕심, 탐욕이 합해져 이러한 터무니없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의 단추를 누른 자나, 히틀러, 스탈린 등의 치하에서 독재체제를 거들어 온 자들이나, 윤석렬의 사냥개가 되어 설쳤던 검사 놈들이나 다 똑같은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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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에 전시된 유물들

(병마용은 진시황의 인간생명 중시의 혁신적 아이디어의 산물인가?)

그러나 이와 정반대의 시각에서 병마용을 볼 수도 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정말 죽었어도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죽었어도 살아생전과 같은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중국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순장(殉葬)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진시황의 시절에도 순장의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진시황은 순장으로 수천, 수만 명의 사름을 죽이기보다는 병마용으로 이를 대체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병마용을 만든 진시황의 생각은 매우 진보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였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6척 장신의 병사들, 그러나 실제의 키는?)

제1 갱을 나왔다. 2갱, 3갱으로 가는 표지판이 보이는데 그다지 친절하지 못하다. 2갱을 찾다가 어느 건물로 들어갔다. 작은 박물관이라 해야 할까, 병마용에 관한 전시관이었다. 병마용과 병마용의 발굴과정에 대한 내용이 아날로그적으로 설명, 전시되어 있다.


별 것 없어 보여 대충 보고 나오려는데, 중간 이후 보관상태와 작품성이 좋은 병마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리 상자 안에서 조명을 받으며 서있는 병마용들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병마용들은 대개 키가 180센티 이상으로 보인다. 그 시대라면 장정들의 평균키는 160센티를 넘지 않았을 텐데, 큰 키로 용맹함을 강조하려 했나라는 생각이 든다.

병마용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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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 2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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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 2갱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2호갱와 3호갱)

2호갱으로 갔다. 2호갱은 1호갱에 비해 규모가 현저히 작다. 2호갱은 혼성 부대의 갱도로, 보병, 기병, 궁병, 전차병 등 다양한 군종이 정교한 진형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잘 보존된 병마용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현재도 발굴 및 복원 중이이고 하는데 그 표시가 보이기도 한다. 쓰러져 파손되어 있는 병마용이 많이 보인다. 넘어진 상태에서 흙이 덮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넘어진 군사용이 마치 진짜 사람들의 유해처럼 보이기도 한다.


3호갱으로 갔다. 3호갱은 2호갱보다도 규모가 작다. 그런만큼 유물의 양과 질도 앞의 두 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3호갱은 군대의 지휘부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래서 고급 장군용과 의장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전략을 논의하는 지휘 본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마치 회의실 같은 모습의 공간이 보인다.


3호갱은 앞의 갱들보다 볼 것도 덜하고, 그리고 또 오래 걸어 다리도 아파 적당히 보고 나왔다. 이로서 병마용의 관람이 끝났다. 4호갱도 있는데 내용물이 없이 비어 있어 공개를 않고 있다고 한다. 진시황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공사가 중단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병마용 인근에 진시황의 실제 무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발굴되지 않아 큰 흙무덤 상태로 남아있다고 한다. 관광객들에게 공개는 하지만 별로 볼거리가 많지 않아 찾는 사람은 그다지 없다고 한다.

시안시의 밤 뒷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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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앙비앙면

(비앙비앙면으로 저녁 식사)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오후 5시 약속장소에서 차를 타고 종루 근처에 내렸다. 종루를 남대문이라 할 때 북창동쯤에서 내려준다. 여긴 보석과 화장품, 그리고 명품을 판매하는 대형 쇼핑센터가 즐비하고, 그 뒷골목은 완전히 젊은이들의 거리이다


좁은 골목에 수많은 음식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많은 젊은이들이 떠들며 돌아다니기도 하고, 작은 음식점에서 꼬치와 술을 즐기기도 한다.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금방 피로해진다. 호텔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비앙비앙면과 닭 날개 꼬치로 저녁을 먹고 오늘 일정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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