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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폭풍의 언덕(嵐が丘),

여자에 대한 집착이 빚은 연속된 복수

by 이재형

■ 개요


영화 <폭풍의 언덕>(원제: 嵐が丘)은 에밀리 브론테의 장편 소설 <폭풍의 언덕>의 스토리를 일본의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를 배경으로 설정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이 영화를 감독한 요시다 요시시게(吉田喜重)는 28년의 세월에 걸쳐 이 작품을 구상하였다고 한다. 이 영화는 1988년에 제작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에는 신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는 야마베(山部) 일족이 있었다. 야마베 일가는 두 분파로 나뉘었는데, 본가는 '동쪽 장원'에 분가는 '서쪽 장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같은 집안이었지만, 두 집안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동쪽 장원의 주인이 교토에서 어린 사내아이를 데려오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 일본 가마쿠라 시대에 대하여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가마쿠라 시대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일본은 백제와 친밀하게 지냈으며, 신라와는 상당히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자 일본은 졸지에 대륙을 향한 루트를 잃어버리고 만다. 백제와 친하게 지냈을 때는 백제와 활발한 문물 교류를 하기도 하였지만, 백제를 통하여 중국과도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한반도 루트가 단절되고 나서는 대륙과의 문물 교류가 거의 중단되고 만다. 얼마 후 일본은 헤이안쿄(平安京, 지금의 교토)로 수도를 옮기고 이때부터 헤이안 시대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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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였던 아주 이중적인 시기였다. 대륙으로부터의 문화 수입이 단절되면서 일본 고유의 문화인 국풍(国風) 문화가 절정을 이루었다. 가나 문자가 발전했으며, 고전 문학이 황금기를 맞아 수많은 장편 소설과 수필, 시가가 탄생하였다. 지금까지의 중국 화풍에서 벗어나 일본 고유의 회화가 발달하였다. 귀족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향유하면서, 귀족 문화가 번성하였다.


이와 반대로 헤이안 시대는 '악령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귀족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 이들의 원령(怨霊)이 재앙을 가져온다는 믿음이 퍼지면서 사회는 불안해졌다. 이러한 불안을 틈타 원령을 진정시키고 저주를 푼다는 음양도(陰陽道)가 성행하였으며, 불교의 타락으로 말법 사상(末法思想)이 확산되었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으며, 수도인 헤이안쿄에서조차도 대낮에 도둑떼가 들끓는 세상이 되었다. 귀족들은 백성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사병을 두고, 백성들을 탄압하였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가마쿠라 시대는 바로 헤이안 시대가 종료되면서 시작되었다. 미나모토 가문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시대로서, 백성들은 헤이안 시대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헤이안 시대로부터 내려온 원령과 저주 등 주술적인 믿음이 횡행하고 백성들은 도처에서 굶주리고 죽어가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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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산 중턱에서 한 남자가 하인들을 시켜 무덤을 파도록 하고 있다. 하인들은 노골적으로 싫다는 모습을 보이지만, 남자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관이 나올 때까지 무덤을 판다. 관이 나타나자 남자는 무덤 속으로 뛰어들어 관 뚜껑을 열려고 한다.


어느 날 야마베 가문의 본가인 동쪽 장원의 주인 다카마루가 서울(교토)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어린 남자아이를 데려온다. 다카마루는 아이에게 '오니마루'(鬼丸)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자신의 집에서 키웠다. 다카마루에게는 장남 히데마루(秀丸)와 딸 키누(絹) 두 아이가 있었다. 다카마루는 오니마루를 두 아이에게 소개하는데, 키누는 오니마루를 아주 좋아하지만, 히데마루는 그를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


몇 년 후, 오니마루는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동쪽 장원의 하인으로 일한다. 키누 역시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랐다. 그녀는 머지않아 도읍의 카모(加茂) 신사로 가 무녀가 될 몸이었다. 야마베 가문은 대대로 신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는 집안으로서, 세상과는 철저히 격리되어 왔다. 그들은 높은 산 위에 살며 마을로 내려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야마베 가문의 여자는 성인이 되면 서울로 가서 무녀가 되어야 했다. 야마베 가문의 여자가 서울로 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같은 가문의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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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마루는 여전히 오니마루를 싫어했지만, 키누는 남몰래 오니마루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오니마루의 곁을 떠나 도읍으로 가고 싶지 않았던 키누는 분가인 서쪽 장원의 장남 미츠히코(光彦)에게 시집가기로 결심한다. 결혼 전날 밤, 키누는 오니마루를 불러 몸을 허락한다.


어느 날 떠돌이 사무라이들이 동쪽 장원을 향해 다가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카마루가 무장을 하고 달려나갔지만, 그는 떠돌이 사무라이들에게 죽는다. 히데마루는 이미 오래전 장원을 떠나 있었다. 일족은 오니마루에게 다카마루의 대를 이어 장원을 맡기려 하지만, 집을 떠나 있던 히데마루가 아내 시노(紫乃)와 아들 요시마루(良丸)를 데리고 돌아와 오니마루를 내쫓는다. 결국 오니마루는 그곳에서 추방당한다.


몇 년이 흘렀다. 키누는 미츠히코와의 사이에 딸을 낳는다. 그 무렵, 오니마루가 다시 산으로 돌아온다. 그는 전쟁에서 세운 공로로 이 땅 일대를 다스리는 '지두(地頭)'라는 지위를 얻었다. 오니마루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히데마루의 아내 시노가 떼도적들에게 윤간당해 살해된다. 아내를 잃은 히데마루는 출입이 금지된 마을을 드나들기 시작하고, 결국 마을 사람들에게 살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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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마루가 죽자 오니마루가 동쪽 장원의 당주 자리에 오르게 된다. 오니마루는 히데마루의 아들 요시마루를 혹독하게 부린다. 얼마 뒤 서쪽 장원의 당주 미츠히코의 여동생 타에(妙)가 찾아와 오니마루에게 자신을 아내로 맞아달라고 부탁한다. 오니마루가 이를 거절하자 타에는 하녀라도 좋다고 하면서 동쪽 장원에 머무르겠다고 한다. 타에는 오니마루를 유혹하지만, 키누밖에 머릿속에 없는 오니마루는 타에를 강간하고, 이에 타에는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한편, 서쪽 장원에서는 들도적들의 습격을 받아 미츠히코가 죽고, 키누 또한 산후 조리가 나빠 세상을 떠난다. 키누를 포기하지 못한 오니마루는 키누의 시신이 묻힌 무덤을 파헤쳐 그녀의 유해를 집으로 가져온다.


다시 십여 년이 지났다. 어머니와 같은 이름이 붙여진 키누의 딸 키누가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하였다. 딸 키누는 청년이 된 요시마루와 마음을 나누며 서로 사랑하게 된다. 오니마루는 아직도 키누에게 집착하여, 그녀의 관을 집안에 모셔두고 그녀의 유골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어머니의 시신이 모욕당하는 것을 본 딸 키누는 오니마루에게 맞서고, 오니마루는 그녀를 폭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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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본 요시마루가 오니마루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결투 끝에 오니마루는 오른쪽 손목이 잘리고 만다. 딸 키누와 요시마루가 어머니 키누의 관을 매장하기 위해 관을 말에 실어 무덤으로 향한다. 이때 말이 갑자기 달려 오니마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오니마루는 관을 들고 화산 분화구로 다가가 뛰어든다.


■ 약간의 감상


영화 전체적으로 아주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지배한다.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동쪽 장원은 높은 산 중턱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땅에 세워져 있다. 그런 가운데 수시로 도적떼가 나타나 사람을 죽이고 사라진다. 산 아래 마을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상태이다. 굶주린 백성들은 사람만 보이면 구걸을 위해 매달린다. 쌀 한 톨, 동전 한 닢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을 정도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벌어지는 사랑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복수는 관객들을 전율케 한다.


에밀리 브론테의 원작 소설 <폭풍의 언덕>은 <리어왕>, <백경>과 함께 영미 문학의 3대 비극이라고 평가받는다고 한다. 필자는 원작 소설을 읽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원작 소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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