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편 15) 조선의 민란과 일본의 잇키(一揆)

by 이재형

근세 이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농민들은 힘들게 살아왔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식량은 그 나라 인구가 겨우 먹고살 수 있는 정도로 생산되었다. 아니, 그보다는 식량 생산량에 따라 인구가 결정되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의 밑바닥 층을 형성하는 농민들에게 충분한 식량이 돌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식량 생산의 주체이면서도 항상 먹을 것이 부족하여 생존 선상에서 허덕였다.


농민들은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여 더 이상 뒤가 없을 때 지배층에 대하여 집단으로 반기를 든다. 이것을 '민란'(民亂)이라 한다. 조선 500년 동안 민란은 300회 정도 발생했는데, 대부분은 19세기에 발생하였다고 한다. 특히 1811년 발생한 '홍경래의 난' 이후 민란이 집중되었다.


일본에서도 우리나라 민란과 같은 농민 봉기가 자주 발생하였는데, 이를 '잇키(一揆)'라 한다. 잇키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에도 시대 260여 년간만 해도 무려 3,000~3,700건의 잇키가 있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거의 2만 회에 가까웠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의 농민이라고 해서 특별히 일본의 농민들보다 식량 사정이 더 좋았을 것은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농민 봉기 숫자의 차이가 날까? 그 원인과 이유를 살펴보면 조선과 에도 시대 일본의 사회 시스템 차이를 알 수 있어 흥미롭다.

(1) 농민들의 결속력


우선 농민들의 결속력이 조선에 비해 일본이 훨씬 높았다. 조선 시대 토지는 명목상으로는 왕의 것이라 하였지만 사실상은 사유제였다. 따라서 농민들은 개개인에 따라 처한 환경이 달랐다. 소작농이 있는가 하면 소농, 중농, 대농 등 개인에 따라 처지가 달랐다. 따라서 가혹한 수탈이 있더라도 받아들이는 고통이 각자 다르므로 위험한 민란에 대한 뜻을 모으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은 농토는 영주의 소유이며, 농민들은 경작권만 가졌다. 그래서 같은 마을의 농민들 사이에 경작 면적은 큰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세금은 가구별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마을 단위로 부과되었다(무라우케 제도, 村請制). 마을 전체가 내야 할 세금이 결정되면 주민들이 협의하여 세금을 분담하였다. 이러한 상황이므로 마을 사람들은 공동운명체로서 훨씬 강한 결속력을 가질 수 있었다.


(2) 민란에 대한 제재


조선의 민란은 농민들 간의 결속력이 낮으므로 잘 일어나지 않는 대신, 일단 일어나면 상당히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 반체제적 성격이 강하였다. 그래서 조정은 민란을 국가 체제에 대한 위협이라 보고 거의 역모에 준하는 정도로 강력히 처벌하였다. 자칫 민란의 선두에 섰다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기 쉽다. 일부 식솔이 살아남더라도 사회적으로도 완전 매장된다.

일본에서도 막부는 잇키를 엄중히 금지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잇키는 학정으로 인해 발생하였다고 보고, 농민에 대한 처벌과 함께 해당 영주나 중간 관리자에 대해서도 함께 책임을 물었다. 심한 경우 영지를 몰수하는 가이에키(改易)를 단행하거나 자결(셋푸쿠, 切腹)을 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농민에 대해서는 주동자를 처형하는 선에서 그쳤다. 잇키가 일어나면 대개는 세금의 감면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 시대 일본 농민들은 잇키를 마치 노조가 단체 교섭하는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물론 주동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그 결정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목숨을 잃은 주동자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의민(義民, 기민)'이라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유가족들은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부양하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조선에 비해 주동자가 갖는 사회적, 개인적 부담이 현저히 낮았다.


(3) 갈등 조정 및 완충 기능


조선에서는 농민들이 학정과 세금에 시달려 관청과 갈등을 겪더라도 이를 호소할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백성들은 지방 관리가 과도한 수탈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 관리를 우회하여 더 높은 선에 이를 호소할 수 있었다(격쟁이나 상언 등).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했는지는 모르지만, 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길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면 백성들은 임금이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도와줄 것이라 믿기도 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희망과 기대가 이루어진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희망이 있다는 자체가 과격한 행동을 어느 정도 자제시켰을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지방마다 관과 백성의 갈등을 완충시키거나 중재할 집단이 존재했다. 바로 사림의 선비들이나 지방의 유력 가문의 존재다. 이들 가운데는 지방 수령 못지않은 권위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관과 백성의 갈등이 극한에 이를 상황에서 이들의 중재가 갈등을 낮추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은 완충 내지는 조정 장치가 없었다. 에도 시대의 일본은 철저한 위계 사회였다. 위계 순서를 어겨 바로 윗사람을 우회하여 그 윗선에 의견을 말하거나 호소하는 '월소(越訴, 오소/에쓰소)'는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농민이 말단 관리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위에 호소할 방법이 없었다. 정 억울하면 잇키라는 비상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주는 농민들을 포함한 영지 내의 모든 사람에게 왕과 같은 존재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영주가 정한 과도한 세금에 고통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영주와 농민의 사이를 중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신 농민들은 자신들이 잇키를 일으키면 영주에게도 적지 않은 불이익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조선에서는 민란이 적었던 대신, 일본에서는 잇키의 빈도가 훨씬 빈번했다고 생각한다. 그랬기에 조선의 민란은 사회 체제에 대한 반발이라는 반체제적 경향이 강했지만, 일본의 잇키는 거의가 과도한 세금이라는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발생하였다는 특징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