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조선을 병탄(倂呑)하자마자 바로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일제 수탈을 위한 기반 작업이라 평가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조선 농업의 실태 파악과 농업 근대화를 위한 기초 자료의 구축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틀어 근대 이전에 그런 단순한 목적으로 토지 조사가 이루어진 적은 없다. 대부분 세금을 더 거두기 위해서나 수탈을 목적으로 하였다.
조선에서는 양전(量田)이라는 이름으로 토지 조사 사업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것으로 태종 양전, 세종 양전, 성종 양전 등을 들 수 있다. 지주들로서는 자신의 재산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다. 그래서 토지 조사에 대해 반발했으며 수치를 축소하여 신고하기도 하였다. 선조 때에도 양전을 시도했으나 당시의 정치적 혼란과 지주들의 반발로 좌절되었다.
이런 상황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는 토지 조사를 검지(檢地)라 하였다. 일본은 통일 정권이 없었으므로 전국적인 검지가 불가능하였다. 대신 각 영주인 다이묘(大名)들이 자신의 영지 산출량을 파악하기 위하여 영내에서 검지를 실시하였다. 대부분 자진 보고 형식인 사시다시(指出)로 이루어졌는데, 각 마을에서는 산출량을 축소하기 위해 여러 편법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일본 최초의 전국 단위 검지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에 의해 이루어졌다. 1582년부터 장장 16년에 걸쳐 이루어진 이 조사를 태합검지(太閤檢地)라 하는데, 이는 이후 검지의 토대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 검지를 통하여 일본 전국의 산출량을 파악하는 동시에 지역별로 제각각이던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였다.
태합검지 결과 일본 전국의 쌀 산출 능력은 약 1,850만 석(石, 고쿠)으로 집계되었다. 이 식량 산출 능력을 석고(石高, 고쿠다카)라 한다. 1석은 약 150kg(180리터)으로서, 보통 성인 한 사람이 1년 동안 소비하는 양이다. 이 석고는 각 영주들의 힘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었다. 석고가 높을수록 인구가 많고 그만큼 군대도 많이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100석당 2~3명의 군인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석고가 1만 석 이상인 영주를 다이묘(大名), 그 이하를 쇼묘(小名)라고 했다. 임진왜란 무렵 일본에는 250명 정도의 다이묘가 있었다. 석고가 가장 높았던 영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 256만 석이었고, 그 다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할지인 222만 석이었다. 절대권력자인 히데요시의 석고가 어떻게 도쿠가와보다 적은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으나, 히데요시는 그 외에 친족의 영지가 몇백만 석이나 되었으며 주요 광산과 상업 도시를 독점하였다. 실제 경제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까마득히 웃돈다.
그럼 이 시기 일본의 인구는 어느 정도였을까? 학자에 따라 1,000만 명에서 1,800만 명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는데, 식량 생산량에 조금 못 미치는 1,700만 명 정도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총병력은 거의 50만 명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중국을 제외하고는 세계 최대 규모의 병력이라 할 만하다. 이 시대 명(明)나라의 병력은 서류상으로는 200만 명이 넘으나 실제로는 100만 명 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대부분 지역의 붙박이 병력이라 유사시 실제 동원 가능한 병력은 10만 명 미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 시기 조선의 인구와 식량 산출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당시 조선의 인구는 호적상으로 400~500만 명 정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세 회피 등으로 누락된 인구가 많으므로 역사학자들은 당시의 실제 인구를 1,000~1,10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그리고 식량 생산량은 일본식으로 환산할 경우 1,000~1,200만 석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조선의 식량 생산량이 일본의 수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국토 면적의 차이도 있지만 농업 기술의 차이 때문인데, 이는 자연조건(自然條件)에서 기인한 면이 크다. 쌀 생산에 있어서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移秧法)은 씨를 직접 뿌리는 직파법(直播法)보다 생산성이 월등히 높다. 일본은 이 시기에 이미 이앙법이 보편화되었다. 이에 비해 조선은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이앙법이 이용되었다.
조선이 이앙법을 널리 보급하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앙법은 모내기철에 물이 없으면 그해 농사를 망친다. 이앙법은 그야말로 극단적인 도박과 같은 농법이었던 것이다. 강수량이 적고 관개(灌漑) 시설이 부족했던 조선으로서는 이 농법을 전면적으로 채택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조정에서 이앙법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조선은 이앙법이라는 첨단 기술을 몰라서 채택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연조건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계획하면서 조선의 산출량을 1,100만 석 정도로 추정했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 한국 역사학자들의 추정치와 거의 일치하는 수치이다. 과연 그는 어떻게 조선의 식량 산출량을 그렇게 정확히 추정할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의 드라마나 영화 등을 보면 일본이 장기간에 걸쳐 조선 침략 계획을 세우고 스파이를 파견하여 광범위하게 염탐한다는 내용이 많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 침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즉흥적인 결정에 가까웠고 준비 기간도 짧았다. 이들은 발로 뛰며 조선을 조사한 것이 아니라 데이터 분석을 통해 조선의 실태를 파악하였다. 조선을 오가는 외교관들이 조선 관리를 통해 실태를 알아냈으며 관련 서적을 수집하였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취득은 결정적이었다. 이렇게 모은 자료들을 전문 행정 관료들이 집중적으로 분석한 결과였다.
여하튼 당시 조선의 식량 산출량은 일본식으로 환산할 경우 대략 1,000만 석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일본식 군대 보유 기준으로 환산한다면 조선도 25만 명의 병력을 보유할 경제력을 가진 셈이 된다. 일본에서 100석당 2~3명의 군사라는 것은 지속 가능한 선에서의 군대 보유 능력이다. 단기간에 무리하게 뒷일을 생각않고 병력을 양성한다면 그 이상의 병력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시 규슈의 영주들에게는 100석당 5명의 군사를 차출하도록 명령하였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조선도 20~30만 명 정도의 군대를 유지할 경제적 잠재력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혼란, 군정(軍政)의 문란, 그리고 200년 동안 지속된 평화라는 요인들이 겹쳐 국가 전체의 방비가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