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들은 “용가리”라 하면 심형래가 1999년에 제작한 영화 <용가리>를 떠올리겠지만 이보다 30년 전에 이미 <용가리> 영화가 처음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괴수영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대괴수 용가리>는 1967년에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당시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괴수 영화 중 <고지라>를 참고하여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영화 <대괴수 용가리>는 이미 제작과정에서부터 큰 관심의 대상이 되어, 그 제작 과정이 신문이나 잡지 등을 통해 연일 보도될 만큼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그로 그럴 것이 이 영화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여러 가지 기법의 특수촬영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그러한 신기한 영화기술에 호기심을 갖고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용가리는 서울 시내를 쑥대밭으로 만드는데, 용가리에 의해 파괴되는 서울시내 빌딩들과 도시시설들을 모두 미니어처로 만들어 현실감을 더했다. 이 미니어처 세트 촬영은 우리나라에서는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좀 엉성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으나, 그 당시로서는 서울 시내의 건물이 파괴되어 무너지는 영화 속의 상황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전선 부근의 갈라진 땅 속에서 어느 날 “용가리”란 괴수가 출현한다. 용가리는 공룡 모습을 한 괴수로서, 입에서는 불을 뿜는다. 용가리는 서울로 들어와 시내의 건물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기 시작한다. 용가리의 공격에 고층빌딩은 파괴되고 무너져 내린다. 군대가 동원하여 용가리를 공격해보지만 용가리는 끄덕도 않는다. 전투기로 용가리를 공격해보지만 전투기는 오히려 용가리가 입에서 내뿜는 불에 의해 추락하고 만다. 이때 용감한 한 젊은 과학자와 소년이 나타나 죽음을 무릅쓴 모험 끝에 마침내 한강철교를 파괴하려고 하고 있는 용가리를 쓰러뜨린다.
<대괴수 용가리>는 괴수영화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괴수영화란 새로운 장르의 영화를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이 영화가 우리나라 괴수 영화로서 처음은 아니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하지 못하나 1960년대 초반에 고려시대를 시대 배경으로 <송도 말년의 불가사리>란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조잡한 인형으로 불가사리란 괴수를 만들어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괴수영화라 보기는 어려웠다.
우리나라 괴수 영화의 효시라 할 <송도말년의 불가사리> 포스터
<대괴수 용가리>가 괴수영화로서 흥행에도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이후 우리나라에서 상당기간 괴수영화의 대가 끊기다시피 하였다. 아무래도 괴수영화는 특수촬영 등 첨단기술이 많이 투입되어야 하며, 또 많은 예산이 소요되어야 하는 반면 그 흥행은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후 심형래의 <용가리>나 <더 워>, 그리고 봉준호의 <괴물> 등 괴수 영화는 드물기는 하나 그 맥을 이어왔다.